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요즈음 국제사회에서 안하무인으로 따돌림과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아베정권이 일본의 내국인들에게는 인기 절정의 정치적 안정 세력을 구가하고 있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연출되고 있다. 그 오만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군함과 이끄는 영국의 군함들이 잇따라 일본에 나타나 그 위력을 과시하며 겁을 주곤 했을 때 당시의 중앙정부인 막부가 전혀 대응을 못하고 속앓이만 했던 시절로 거슬러 더듬어 보아야 한다.
 국가의 위기를 느낀 당시의 우국 사무라이들에게는 큰 위기감으로 다가왔고, 케케묵은 막부를 그대로 두고서는 안 되겠다는 분위기 속에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국가체제를 만들어 과감한 개혁과 개방만이 일본의 살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그들은 막부를 무력으로 해체시키고 명치유신을 성공작으로 이끌었다. 섬사람 일인들의 그 자기 위주의 폐쇄성이 어느새 명치유신과 더불어 유럽과 백인들에 대한 강렬한 동경심으로 바뀌면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부르짖으면서 서구화에 몸이 달아올랐던 그들에게 유럽이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의 일인들은 구미의 문명은 수입하되 일본의 영혼은 잘 지켜야 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분에서 양혼양재(洋魂洋才)가 되고 말았다. 명치유신과 함께 많은 일본의 사절단, 유학생들이 구미로 뛰쳐나갔다. 유럽의 발달된 문명과 미국의 광대함에 그들은 기겁하게 놀랐고 그들은 모든 면에서 유럽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은 ‘명예유럽’이라 불릴 정도로 단시간에 국제사회에 부상했다. 일본은 당시 유럽 각국의 장점만을 따르면서 ‘유럽 비빔밥’으로 변모해 간 것이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이룬 일인들이 구미에서 배운 것들 중에서 가장 못된 것이 있었으니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한 ‘식민지 정책’이 그것이다. 그들의 논리란 ‘우리 일본이 이들 나라를 그대로 둔다면 구미 열강들의 식민지가 되고 말 것이다. 일본이 나서서 이들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들의 잔인하고 호전적인 모습을 되돌아 볼 때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만약 진다면 국가의 멸망과 더불어 일가의 멸족을 의미하기에 일본의 소국가들은 영주를 위시한 사무라이들을 중심으로 칼싸움만 부지런히 칼싸움 연습만 하고 있다가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전투에 나가 용감무쌍하게 잘 싸우기만 하면 되는 그들이 그 배경이 된다.
 수많은 전쟁을 통해 사무라이들의 위상은 점점 높아지고 일인들의 공격적인 기질 또한 높아만 간 것이다. 그것은 공격성, 잔인성, 단칼에 베어버리는 단호함, 강인함 등이니 우아한 문화 따위는 아예 담을 쌓았다는 얘기다. 심지어는 우리에게서 조차 ‘그 사람 약속은 칼 같이 지킨다’라 하여 정확성을 표현하기도 하는 데 한 칼에 잘라버리는 사무라이 문화의 전염인 것이다. 사무라이는 세습되었으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주에 대한 무제한의 충성심, 검소한 생활, 무사로서의 멋있는 태도와 책임감 등이었다. 그들이 모시는 영주에게 폐가 되는 일이 있었거나 실수가 있었을 때는 할복으로 실수를 대신할 만큼 목숨을 걸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사무라이로서의 도리였던 것이다. 사무라이들이 할복을 하고나면 모든 책임과 죄과가 면제되었다.

 일본의 야꾸자들이 잘못한 경우에 손가락을 한 마디씩 잘라서 두목(오야봉)에게 바치는 것도 할복에 준한 벌칙이다. 그들은 새끼손가락의 미디부터 자르는 데 실수가 많은 야꾸자들은 점점 손가락 마디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사무라이와 칼의 문화, 이것이 일인들의 속마음이라는 말이다.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이 긴 칼을 차고 가뜩이나 좁은 전투기의 조종석에 타던 가관인 그들의 모습을 지금은 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들의 사무라이 정신만은 오늘도 그대로일 뿐이다. 현대전은 첨단 무기로 잘 무장된 군대만이 이길 수 있음을 그들이 더 잘 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그러한 무기를 제조하는 데 있어서 앞장섰고, 지금도 그 노력은 중단 없이 이어지고 있다. 예리하고 잘 베어지던 일본도가 정밀하고 정확한 미사일로 바뀌고 있을 뿐이다. 과거 일인들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근대에 들어서 주로 유럽에서 큰 물줄기의 문화를 송두리째 수입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그들의 생활태도를 보며 칭찬하는 것들의 상당수는 유럽에서 들어온 생활습관이고, 일본이 아시아에 위치해 있지만 일본에서 유럽을 빼면 남는 게 없다.
 사무라이 정신을 앞세운 그들의 조선(대한민국) 침략의 근저에는 ‘조선인은 예로부터 다른 나라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온 열등감과 자기비하에 빠진 민족으로 그들을 영원히 지배해야 한다’가 깔려있다. 이러한 식민지사관의 정립과 실현을 위하여 일제는 조선침략을 위한 군사적 준비와 더불어 자국의 사학자들을 동원하여 한국사를 연구하면서, 주로 정치적 필요에 초점을 맞추면서 한반도 지배를 위한 학문적 기반을 닦아나간 것이다.

 그들은 우리겨레 뿌리 역사인 환국(3,301년 환인), 배달국(1,565년 환웅), 단군조선( 2,096년 단군)의 찬란한 역사를 신화라 하여 잘라내어 버리고, 단군조선의 서쪽 변방 북경 근처 변한을 잠시 점령했던 위만의 정권을 우리의 원 뿌리라 칭하면서 위만의 손자 우거 때 한 무제의 침략을 받아 대동강 유역에 한사군이 설치됐다는 조작극을 만들어내기에 이르게 되었고, 더욱 통탄할 일인 일본이 물러간 지 오래 된 지금도 후세대들에게 이 식민지사관으로 오염시키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까지 이르고 있다.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인들은 자국의 식민주의 사학자들을 대거 조선으로 데려와 1920년에 무단통치에서 유화적인 문화통치로 바꾸면서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이들이 날조한 내용대로라면 한반도의 북쪽이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니 우리나라는 땅덩이리만 바다에 살짝 내민 반도로 존재했을 뿐 정치니 나라니 하는  것은 없고 원천적으로 식민지로서의 열등한 피지배 민족만 있었다는 천지가 공노할 날조가 그들의 일이었던 것이다.
 일인 금서룡(今西龍)이란 자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일찍이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라는 기록에서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국(國)을 인(因)으로 날조해 고쳐놓으면서, 마치 환인이 환웅을 낳고, 환웅이 단군을 낳아 삼대에 걸쳐 통치한 것처럼 꾸며놓고, 그것도 모자라 호랑이와 곰까지 그러들인 신화라느니 하여 우리의 영혼마저 깡그리 잘라낸 것이다.

 일제가 침략수단으로 날조하여 내세운 한사군설이 우리를 옥죄는 올무가 되면서, 이 황당한 엉터리 날조극을 우리 사학자들이 그대로 따르게 되고 우리는 지금 중국에게마저 역사를 빼앗기고 있고, 나아가 이 황당한 주장이 서계계각국의 세계사 교과서에 그대로 실려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너뜨리려면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부터 청산하여야 한다. 일제의 식민사관, 중국의 동북공정, 그리고 우리의 이른바 주류 사학계 까지 합세하여 한국사의 뿌리를 뽑아내고 있으니 어찌 이를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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