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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존재( 고승[高僧]의 ‘[我相:나]’에 대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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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08  10: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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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가을로 접어드니 하늘은 맑고 푸르며 또한 마음조차 잠잠해진다. 문득 생각해보니 필자는 밥 먹고 일하고 잠자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내 몸뚱이와 내 이름 석 자가 ‘나’ 인 줄 착각하고 한 평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서산대사의 시(詩)를 살펴보니,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생겨나는 것이요.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은 한 조각의 구름이 흩어짐과 같으니.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구름은 본래부터 실체가 없는 것.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태어나고 죽는 것이(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만물과 생각이 인연으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이니, 몽답청산(夢踏靑山)에 각불로(脚不勞)요, 꿈에 청산을 헤매고 돌아다녀도 다리는 안 아프고, 영입수중(影入水中)에 의불습(衣不濕)이라. 나의 그림자가 저 물속에 있지만 내 옷은 젖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에 의해 이끌려 다니는 믿을 수 없는 자기육신을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여기 이 시대의 고매[高邁]한 스승인 종범 스님의 견해를 함께 살펴보자. 그리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서 떠나 보자. 오늘 제목은 ‘나는 누구인가?’ 이다. 우리가 보통 나를 부를 때 “누구세요?” 그러면 “아무갭니다.” 그건 명칭인 아(我)이다. 이름을 댄다. 그러나 이름이라고 그러는 것은 보이지 않을 때 자기를 알리려고 만든 것이다. 이름 명자(名)“ 그러면 이름을 대면 알게 된다. 그러니 사람은 명칭(名稱)가지고 사는 셈이다. 그리고 ”누구세요?“ 그러면은 ”수도검침 나왔습니다. 택배입니다.” 이게 역할 아(我)인 것이다. 아(我)는 수도검침 하는 사람이다. 택배 가지고온 사람이다. ”누구세요? “하면 ”앞집인데요“ 이렇게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나는 누구의 아버지다. 나는 누구의 아들이다. 나는 누구의 남편이다. 이렇게 아들, 아버지, 남편 이런 걸로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순전히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자신이 인식 되는 거다. 아버지 없으면 아들 안 될 거 아닌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식이 되는 그런 ‘나’인 것이다. 그런데 옛날 큰스님들이 나에 대해서 자꾸 말씀하신 것은 그런 게 아니고, ”니가 나를 보느냐?“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뭐가 보느냐?“ ”눈이 봅니다.“ 그러면 ”금방 죽은 사람이 산사람하고 눈이 같느냐? 다르느냐?’ 하고 묻는다. “금방 죽은 사람은 산 사람하고 같습니다.” “금방 죽은 사람이 보느냐?” “못 봅니다.” “왜 눈이 똑같은데 못 볼까?” 이렇게 질문을 한다. 그게 ‘나’에 대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럼 눈이 보는 게 아니지 않냐?’ ‘그럼 눈이 안보고 뭐가 봅니까?’ ‘그 보는 놈이 뭔지 그걸 찾아라.’ 길가는 나그네가 남의 집에 가서 하룻저녁을 자고가도 그 이튿날 갈 적에 주인을 안 찾아보고 가면 무례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이 몸을 가지고 평생을 살면서 이 몸의 주인이 누군지 안 찾아보고 죽는다. 그렇게 무례하고 살수가 있나? 이런 게 ‘나’에 대한 가르침이다. 참 심오하긴 한데 어렵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나에 대한 가르침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겠다. 그럼 첫째 나는 누구냐? 첫 번째 나는 ‘나는 생멸(生滅)이다.’ '나'라는 건 낫다 죽는 거다. 생멸이다. 생멸은 뭐냐 생일날 태어나서 죽은 게 제사날인  이것이 생멸이다. 우리는 생일날은 있는데 아직까지는 제삿날은 없다. 생이백년(生離百年)이요, 사후천년(死後千年)이라. 살아서는 백년이 안 되지만 죽어서는 천년을 간다, 그게 인생관이다. 그래서 죽을 때 어떻게 죽는가?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제삿날이 언제 돌아올지 이거는 기약이 없다. 이게 생멸이다. 그런데 생멸은 무상하다. 무상(無常)은 뭐냐? 생로병사(生老病死)다. 나는 첫째 ‘생노병사’ 하는 나를 가지고 있는 거다. 생노병사(生老病死)는 무상(無常)한 거다. 일체제세간(一切諸世間) 생자개귀사(生者皆歸死). 일체의 모든 세간은 난 것은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 부성필유쇠(夫盛必有衰) 합회유별이(合會有別離). 왕성함은 반드시 쇠태하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왕성한 것은 다 쇠퇴해 버린다. 또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그런데 지금 만나서 잘 지내는 사람은 헤어지는 거다. 또 지금 뭐 왕성한 것은 나중에 쇠퇴해 버리는 거다. 이게 생멸법이다. 일체개천멸(一切皆遷滅), 모든 것은 변하고 소멸한다. 수명역여시(壽命亦如是). 수명도 또한 그러하다. 이게 생멸 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첫째로 생멸이다. 생멸은 무상하다, 항상 함이 없다. 무상은 ‘생노병사’ 다. 두 번째 나는 ‘나는 오온(五蘊)이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색(色)은 지수화풍 (흙, 물, 불, 공기)넷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우리생각, 정신작용인데 수상행식은 심소(心所)고, 소(所)라는 얘기는 늘 따라 다닌다는 말이다. 그래서 왕이 가면 신하가 가는 거와 같이 따라 다닌다. 반야가 문자반야(文字般若)가 있고, 관조반야(觀照般若)가 있고, 실상반야(實相般若)가 있는데. 문자(文字)는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게 문자고, 관조(觀照)는 마음으로 살펴보는 게 관조다. 실상반야(實相般若)는 실상(實相)의 세계를 말하는데, 그 실상반야(實相般若), 즉, 깊은 실상반야를 실행하실 때에 뭐를 봤는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고, 오온(五蘊)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다 공함을 조견(照見)하였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꿰뚫어 본다. 꿰뚫어 보는 게 뭐냐? “얼음을 얼음으로 보지 않고 물로 본다.”는 의미다. 이것이 꿰뚫어 보는 것이다. 사람을 볼 때 태어나는걸 보되 태어나는 것만 보지 않고 죽는 거 까지 본다. 이게 꿰뚫어 보는 것이다. 만나는걸 보되 만나는 것만 보지 않고 헤어지는 것 까지 본다. 그런데 사람이 왜 고통을 느끼는가? 이 오온이 공(空)함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고통이 오는 것이다. 오온이 공(空)함을 보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것을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한다. 일체고액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오온이 공(空)하다는 공하다는 의미는 뭐냐? 공(空)은 불생불멸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생유멸(有生有滅)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아니라. 생일날이 있으면 낳는 것이 있고 제삿날이 있으면 죽는 날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건 ‘유생유멸’인데, 반야(般若)에 있어서 실상반야(實相般若)를 실행하게 되면 ‘유생유멸(有生有滅)’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이게 조견(照見)이다. 또 우리가 볼 때는 더러운 것이 있고 깨끗한것이 있다. 그런데 공상(空相)에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다. 더러운것도 없고, 깨끗한것도 없다. 우리가 볼때는 유증유감(有增有減)인데, 불어나는것도 있고 줄어드는것도 있다. 그런데 실상반야를 턱 보게되면, 불어나는것도 없고 줄어드는것도 없다,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이것이 두번째 나는 누군가? 나는 오온(五蘊)이다. 오온은 뭐냐? 공상(空相)이다. 그리고 공상(空相)은 뭐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이게 두번째 나(我)이다. 첫번째 나는 생노병사다. 두번째 나는 불생불멸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이게뭐냐? 이 세상에 말과, 생각으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에 접근할수가 없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라고 하는 말을 할 때 ‘불생(不生)’ 이라는 말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떤 말이든지 조금 있으면 사라진다. 그러므로 불멸(不滅)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게 공부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말로하고, 생각으로 하고, 행동으로 하면 안된다. 행동하나 일어나면 벌써 생겼으며 사라지면 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개념도 아니고 언어도 아니고 설명이 아니고 열쇠다. 길가는 나그네한테 방향을 지시해주는 표지판과 같다. 마음과 생각으로 불생불멸을 논하면 천만년을 논해도 불생불멸에 못 들어간다. 나(我)의 실체는 없으며 그 이름이 나(我)인 것이다. 삼천대천세계 즉비세계 시명세계 (三千大千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요, 그 이름이 세계이다. 미진중 즉비미진중 시명미진중(微塵衆 卽非微塵衆 是名微塵衆.)미세한 먼지들은  곧 미세한 먼지들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세한 먼지들인 것이다. 먼지나 인간이나 크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은 다를바 없다.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필자가 이런글을 제시하는 까닭은 살아있는 이 순간이 보석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좀 더 겸허하게 살자는 의미에서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하룻밤의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잠시 번쩍이는 번개와 같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 電應作如是觀)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본래부터 없는 것이니 영원할것처럼 너무 나서지 않아도 된다. 알맹이가 빠진 포장된 겉모습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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