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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독재의 계엄군 총칼에 억울하게 죽어간 전남 광주 시민들의 5.18 민중항쟁의 실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폭동이 아니라 국가기념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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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7  09:5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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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날 때 필자가 30대였으니, 거짓과 그리고 진실을 구분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때의 전남 광주에서 일어났던 5.18 민중항쟁을 보면서 군부독재자들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사건을 은폐하고 언론을 통해서 국민들을 거짓정보로 세뇌시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거짓뉴스를 퍼트리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 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40여년이 지난 작금의 시대에 5.18 민중항쟁에 대해 광주시민이 겪어야 했던 피눈물 나는 상처를 왜곡 주장하는 일부 야당 국회의원들의 발언을 살펴보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필자의 생각만이 모두 옳다고 변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알아야 한다. 극우 야당의원은 5.18 유공자들을 ‘세금을 축내는 괴물집단’ 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에게 ‘시체장사’를 한다는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17.8세의 꽃과도 같았던 자녀들 300여명이 산체로 바닷물 속에 수장된 그 아픔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자유 한국당 국회의원들의 사고방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유공자를 ‘괴물집단’으로 매도하는 이런 파렴치한 인간들이 국회의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앞날을 밝게 해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럼 독자들과 함께 5.18 민중항쟁에 대해서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5.18 사건은 한마디로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의 퇴진, 그리고 김대중(金大中)의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이다. 원인은 박정희(朴正熙)의 오랜 군사독재가 통치능력을 상실한 일련의 사태, 즉 1979년의 부마사태(釜馬事態), 10월 26일 김재규(金載圭)에 의한 대통령 박정희 시해사건(10·26사태) 등이 초래한 국가적 위기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하극상을 통하여 군부를 장악하고 군사독재의 연장을 통하여 해결하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 신군부세력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 투옥하기 시작하자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이에 반발하는 학생 ·시민 연대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시민항쟁은 시민자치와 민주주의공동체 구현 등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27일 새벽 2만 5,000명에 달하는 군을 투입한 무력진압에 돌입하였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 몇 장이나 자칭 탈북자란 사람의 증언 인터뷰 등만을 보고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믿고 있거나,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들이 개입한 일이라 생각해 왔다면, 당신은 그 동안 날조된 자료와 언론플레이에 놀아나 속고 있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세력들은 이러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이 개입한 폭동"으로 왜곡발언 하고 있어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전두환의 증언도 나온 마당에 계속 폭동설을 고집한다면 이것은 억지 부리기와 다를 바 없는 짓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왜 아직도 자유 한국당 의원들은 망언을 해대고 가해자는 처벌 받지 않고 있는 걸까? 우리 현대사의 가장 슬픈 상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에 대해 알아보자.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박정희 대통령이 죽으면서 대한민국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때를 기회삼아 당시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신군부 수장들은 쿠테타를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박정희의 18년 독재에 찌들어있던 우리 국민들은 박정희 사후 대규모 민주화 운동을 일으키게 되고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평화 투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쿠테타 세력은 광주에서 발발한 민주화 운동을 잔인하게 처절하게 탄압함으로서 전 국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자신들의 권력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애초 5.18의 첫 희생자가 청각장애자였으며, 당연히 군인의 지시를 알아듣지 못한 그는 그들이 휘두른 철곤봉에 맞아 다음날 사망했다. 또한 광주의 많은 대학생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죽거나 심하게 다치는 등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광주시민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자식, 친구, 부모가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간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시작된 대규모의 시민 항쟁은 5월 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다음날 전남도청 및 광주 전체의 초토화 진압작전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후 독재 정권에 대항한 대부분의 사회운동의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으며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독재 정권을 끝내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독재자 전두환과 그 일당은 광주 민주화 항쟁 탄압뿐만 아니라 재임기간 내내 숱한 부정부패를 저질러 재판에 넘겨지고 사형을 구형받게 되며 전직 대통력직도 박탈당하게 된다. 5.18광주민주화 운동은 군인들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항해 광주시민과 대학생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방송국과 전남도청 광주시청을 무력 점령해 광주시민군을 결성하면서 시작 되었다. 정부에서는 광주시민군에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시민군들은 광주교도소를 습격 점령해서 교전을 벌였다 그리고 광주 시민군이 총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군인들은 광주를 버리고 외곽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광주는 시민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새벽을 기해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워 광주시민군의 저지선을 통과하고 광주 전남도청을 포위하면서 광주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미 내전사태에 들어간 사항에서 군인들은 광주시민들이 광주시민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폭행과 연행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검으로 찔러죽이고 총 개머리판으로 내려쳐 죽이는 등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리고 광주도청의 시민군은 투항과 전쟁을 놓고 갈등하는 사이에 계엄군에 의해 무력 진압되었다. 이때 죽은 사람의 수가 1000여명이라 한다. 언론은 계엄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방송내용 신문기사 한줄 계엄군의 허락을 받아야 내보낼 수 있었고, 그래서 광주사태를 북한 간첩이 일으킨 폭동으로 광주는 공산화가 되었으며 광주시민을 구하기위해서는 군사진압이 불가피하다고 신군부는 거짓 주장을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부터 암살되어 그의 독재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 사건을 우리는 10. 26 사태라고 부른다. 박정희가 총애해온 전두환은 군부를 규합하고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은 10.26사태라는 민주화의 과도기를 틈타 12·12 통해서 정권을 잡게 된다. 전두환은 당시 크게 치솟아 오르던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 및 야당세력 등의 세력을 제거해야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계엄 해제와 유신 세력의 퇴진을 요구했다. 앞서 4월에는 서울 지역 대학교수들이 학원 민주화 성명을 발표했고, 5월에는 군사 정권의 재등장에 반대하는 지식인 134명이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오랜 독재에 짓눌린 시민들의 민주화 욕구가 거세게 분출되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신군부는 주요 대학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학생운동 지휘부와 정치권의 주요 인사 검거에 나섰다. 학생들이 잇따라 체포, 구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대학생과 계엄군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지펴졌다. 신군부의 계엄 확대 조치로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학생 200여 명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학생들을 무차별로 구타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광주 시내 금남로에서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고,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격분한 시민들까지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갈수록 불어났다. 이들은 계엄 철폐와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곳곳에서 계엄군과 대치했다. 계엄군은 골목까지 쫓아다니며 학생과 시민들을 곤봉으로 마구 때리고 차에 태워 강제로 끌고 갔다. 19일에는 대학생과 시민은 물론 고등학생까지 가세해 시위대가 5,000여 명으로 늘었다. 계엄군은 소총에 칼을 부착하고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위협했으며, 곳곳에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광주 시내 중심가에는 10만여 명의 사람들이 연좌 농성을 벌였다. 택시 200여 대가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시위에 가세하기도 했다. 노동자와 도시 빈민, 회사원, 점원, 주점 종업원 등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여 초기의 학생 시위는 이미 민중 항쟁으로 진전되어 있었다. 이날 밤 20만 명 규모로 불어난 시위대는 노동청과 신역, 전남도청 앞 등지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계엄군의 총칼에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맞섰다. 자정을 전후해 계엄군은 건물 옥상에서 장갑차에 올라탄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서 시위대는 본격적인 무장 항쟁을 벌였다. 이들은 나주, 영산포, 화순 등지의 경찰관서에서 카빈총과 M1 소총 800여 정과 탄환 5만여 발을 탈취해 시위 현장에 반입했다. 그리고 일부 시위대는 광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주변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신군부의 탄압으로 국내 언론들이 침묵과 왜곡 보도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과 실탄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등장한 것은 이날 오후부터였다.

 시민군의 구성은 학생부터 노동자, 공사장 인부, 접객업소 종업원, 날품팔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시민군이 계엄군 임시본부가 있는 도청을 공격하자, 계엄군은 작전상 일단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계엄군은 광주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모든 교통과 통신을 차단한 채 광주를 고립시키고 봉쇄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사태 수습 이전 군대 투입 반대, 연행자 전원 석방, 군대의 과잉 진압 시인, 사후 보복 금지, 부상자와 사망자의 치료, 보상, 요구 관철 시 무장 해제 등을 결의하고 계엄군과 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부 수습위원은 무기 200점을 계엄군에 반납하고 연행된 시민 33명을 넘겨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주남마을 에서 버스를 타고 가던 양민 18명이 공수부대에게 학살되는 등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살상이 계속되었다. 27일 새벽에 계엄군은 전투사단과 공수여단 병력 2만 5,000명을 동원해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이른바 ‘충정 작전’에 돌입했다. 계엄군의 일방적인 공세로 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은 대부분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었고, 일부 생존자는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전일빌딩에 있던 시민군 20여 명은 총격전 끝에 전원 사살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계엄사령부는 6월 5일 민간인 148명이 사망했고, 이 가운데 118명이 총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사망한 군인은 15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1990년 제정된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법에 따라 피해자로 인정된 민간인은 사망 154명, 행방불명 70명, 상이 3,193명, 기타 1,589명으로 모두 5,000명이나 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의 집권 계획에 따른 과잉 진압, 유신독재를 관통하며 이어져 온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따른 영호남 지역감정 조장 등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당시 전두환 소장 등의 신군부가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있는 전남대학과 조선대학을 위시한 청년 학생들이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등의 구호 등을 외치며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시위를 하게 된다.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에 전두환 소장의 신군부 세력은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총살하였으며, 심지어는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총살과 구타를 자행하게 된다. 이러한 군사 정권의 야만적인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군인들과 맞서기 위해 대거 시위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고 시민들도 무장하게 된다. 결국 시민군과 군인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며, 이는 전남 일대에 전역에 번져가게 되고, 그런 와중에 전남 도청에서 무장 시위를 하던 민간인들이 군인들에 의해 겨우 몇 사람만 목숨을 건진 채, 몰살당하게 된다. 하지만 추후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전두환은 사면 받게 되고 출소 후 백담사라는 절에 들어가게 된다. 전두환이 대통령을 하며 빼돌린 국고는 수 천 억 원에 달하며 그와 그의 자손들은 떵떵 거리며 여전히 반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출처: 백과사전) 그러면서 지금까지도 광주시민을 향해 쏜 무자비한 살상행위를 부인하고 있으니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의 모습이 처량하기 까지 하다. 5·18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일이다. 1997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매년 5월 18일로 제정되었다. 매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이런 5.18에 대한 왜곡된 생각과 불신을 버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5.18민중항쟁의 원인은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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