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인사기준 무력화 청문회와 작금의 정책에 뼈저린 깨달음이 있다. “부패한 정권이 무능한 정권보다 나을 수도 있구나, 한 개인이 해먹는 것이 한 나라를 해먹는 것 보다는 났구나, 쓰레기차 피했더니 분뇨차에 받친 기분이다.” 허울 좋은 소득주도성장 및 촛불에 덴 안목을 후회하는 소리다.

 질 좋은 일자리 기업이 만든다 하니 “행정에서 81만개, 4대강 24조면 백만 개 만든다.” 그러나 그 2배의 예산을 쏟고도 최악의 일자리 참사. 미세먼지 줄인다더니 최루탄 터진 듯, 경제 살린다더니 수출증가율 17%에서 –11%로 폭락, 안보 지킨다더니 주요 한미연합훈련 중단했다.

 원전수주, FTA, 망한다더니 성공했다. 광우병 걸린다더니 한사람도 없다. 북한에 돈 줘도 핵 안 만든다더니 만들었다. 인천공황 반대하더니 세계최고다. 주한미군반대, 환승제반대, 청계천반대, 중앙차로반대, 그러나 성공적이다.

 박정희·전두환은 인권말살 독재타도, 3대 세습 북한은 민족유대 손잡고 유엔제재 해제에 여념 없다. 억지춘향인지 홍준표의 위장평화 쇼인지 아리송하다. 그르므로 댓글조작, 블랙리스트, 태양광, 대북석탄·석유, 김태우 제보, 우리들 병원, 등 각종 의혹도 반대로일까?  

 부끄러운 외교수준도 그렇다. 한반도 동북아에서 한국이 미·중 중간에서 조정역할을 할 수 있다는 동북아조정자론도 헛된 이념에 불과하다. 한국은 이들에 비하면 어린애다. 우리의 이익을 미국·중국에 관철시킬 수 없다. 이념집착에 국익을 해칠 수 있다.

 한·미는 동맹국이다. 북한이 한국을 공격하면 미국이 도와준다.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침해당하면 동맹국인 한국이 지원해야한다. 중국은 북한의 동맹국이다. 북한이 한국을 공격할 때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는 북진통일 방해세력이다. 친미 반중 반북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반미이데올로기에 매몰된 관료들이나 청와대참모들은 국민을 불안케 한다. 좌파이념의 시민단체 교수들이 전진 배치된 경제팀은 위기대처능력이 허약하다. 참모 대부분 산업경제 통상이슈 경험이 없다. 정통관료 및 전문가를 포진하여 차세대 먹거리와 국부창출이 걸린 경제 산업이슈가 편협한 참모들에 의해 표류해선 안 된다.

 인간의 다양성과 평등!

 인간은 불평등한 존재로 태어나서 불평등 속에 살다가 죽는다. 죽음만이 평등하게 해줄 것 같지만, 공동묘지, 가족묘지, 국립묘지로 분리된다. 불평등은 다양성이라는 대자연의 질서에 기초한다.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양태는 대자연이 마련한 심오한 다양성의 한 측면인 것이다.

 들판에 피고 지는 수많은 꽃이나 만발하는 꽃송이에도 똑같은 것은 없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도 꼭 같은 것을 본 사람은 없다. 인간 역시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연의 자연존재 창조주의 예술이다.

 인간의 자생적 불평등은 우주적 다양성과 차별성의 한 측면이다. 유교적 가치관이 팽배한 우리는 사회적 관계에서 장유유서라는 덕목이 표현하듯이, 자생적 불평등 속에서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서양은 기독교를 통하여 도덕적 근거를 얻는다. 솔로몬의 영화도 들에 핀 한 송이 백합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평등한 존귀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평등은 남과 비교하여 자기가 우월할 때는 생각지 않는다. 남보다 우월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다. 남보다 나은 자는 평등을 무서워한다. 반대로 남보다 떨어지는 자는 평등의 욕구가 솟구친다. 심리학적으로 평등은 부러움이나 시기 또는 질투심과 관계가 있는듯하다.

 하나님이 사랑과 함께 질투와 시기 부러움의 정서를 심은 것이다. 다만 부러움이나 시기의 정서들이 자아에 대한 존엄성 정서, 또는 인간의 자존심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허영심도 마찬가지다. 모두 다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이다. 

 정치는 이러한 인간의 자연적 정서를 어떤 방향으로 활용하여 인간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시기와 질투를 그대로 따라 정책화한다면 자기보다 더 나은 자와 더 있는 자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려 자기와 비슷하도록 만들어야한다.

 평등의 욕구를 잘못 수용하면 부자를 가난하게 만들고 똑똑한 자를 무지하게 만들어서, 가난하고 무식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최하 지향적 정책을 추구한다. 실제로 평등을 실현시키기 위한 평등화정책이 만들어낸 사회는 결과적으로 하향평준화를 나타낸다.

 소련, 동유럽, 북한 사회가 그렇다. 시기와 질투심 부러움에서 나온 평등의 정책은 빈곤의 평등화를 뜻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구비 조건을 평등하게 만들고 과실과 열매의 평등화는 인류문명 발전과 양립할 수 없다.

 평등의 실현은 자유의 희생을 뜻하므로 독재나 전체주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더 비천하고 무지하게 만든다. 어쩜 인간의 노예화를 조장하는 처방전일 뿐이다.

 순수한 사회주의 그리고 그 논리적 극치로서의 공산주의는 자비와 동정 인류애라는 허울 좋은 간판으로 장식되지만, 그 뒤에 감추어진 파렴치하고 수치스러운 시기와 질투의 정서가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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