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너무 비참했던 ‘흙 수저’ ‘노비(奴婢)’이야기 ]

남 덕 현
고성읍 동외로
 양반(兩班)은 조선시대에 지체나 신분이 높거나 문벌이 좋은 상류 계급에 속했던 사람들을 말하며 노비(奴婢)는 남자종과 여자종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양반과 노비는 똑같은 우리민족인데도 불구하고 두 계급의 삶의 차이는 너무나 크고 엄청나서 양반은 주인행세를 하였고 노비는 노예의 삶을 살았다. 그런 노비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일부분이나마 알아보고자 하며 그것이 현대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독자들과 담론을 나누고자 한다. 양반과 노비의 문화를 요즘 시대의 표현으로는 사회의 ‘양극화’ 혹은 ‘빈부격차’라고도 하며 풍자적으로 ‘금 수저 와 ‘흙 수저’ 문화라고도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피나는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흙 수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현실 앞에서 모두들 절망하고 있다. 한동안 청년층에서 ‘헬 조선’이란 말이 유행하면서 함께 나온 말이 ‘흙 수저· 금 수저’ 수저계급론이다. 지옥과 조선을 합성한 신조어로 말 그대로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란 뜻이다. 현실에 대한 청년층의 불안과 절망, 분노가 드러난 단어로 인터넷에서 시작되어 최근에는 언론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사회적 빈부격차(양극화)와 경쟁은 심해지는데 부모의 자산이나 지위가 뒷받침이 안 되면 개인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지는데다 경쟁마저 불공정해 청년층들의 좌절과 자포자기 심정을 드러낸 자조적인 표현이다. 헬 조선의 등장 이면에는 청년층의 절망이 열정 페이, 무급인턴, 비정규직, 취업난 등 청년층의 현실로 우리사회를 ‘지옥’처럼 여겨지게 했다는 것이다. 고도의 경제 발전 시기를 거치면서 개인의 노력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여전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인식과, 개인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신화가 사라지고 소위 ‘금 수저’로 표현되는 서열 사회에 대한 인식이 청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수저계급론은 대한민국에서 2015년경부터 자주 사용되고 있는 사회 이론으로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직업, 경제력 등으로 본인의 수저가 결정된다.’ 라는 이론이다. 청년실업, 부익부 빈익빈 등의 각종 사회 문제와 맞물리면서 큰 공감을 얻고 있고, 부모의 직업, 경제력 등에 따라서 금 수저, 은수저, 동 수저, 흙 수저 등의 다양한 분류로 갈라진다.
 그런데 이런 수저문화가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역사를 지니며 발전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신라 시대 이전부터 수저문화를 국가적으로 유지 발전시킨 특이한 나라이며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는 수저문화가 급격하게 발전되었고 최하위계급인 흙 수저는 ‘노비’라는 명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조선말이 되면서 전체 인구 구성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40% 가까이 되는 노예국가가 되어 사람이 아닌 물건 내지 가축으로 만든 것이며 개돼지와 동일한 취급을 한 것이다. 모두가 금 수저인 양반들의 비윤리적인 야만행위가 만들어 낸 사회제도였다. 전통적 신분제 사회에서의 최하층 신분을 통속적으로는 ‘종’이라 불렀는데 ‘노’는 사내종, ‘비’는 계집종을 뜻하며 ‘노비’라는 용어는 천민과 함께 사용되어졌었다. 노예제도를 유지했던 수많은 나라들이 일반적으로 타국과의 전쟁에서 데려온 포로나 아프리카 부족들에게서 사들인 흑인을 노예로 부렸는데, 특별하게도 조선은 원시부족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국민을 스스로 노예화 시킨 반인륜적 나라였다. 이 ‘노비’ 신분층은 가장 오래도록 그리고 가장 가혹한 조건에서 유지 존속되어왔다. ‘노비’는 계급적으로 노예로 규정되며 구체적인 ‘노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시기는 고려시대 이후부터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노비가 양반계급인 봉건 지배계급에 철저히 복종하도록 보다 복잡하고 체계적인 ‘노비’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하층민들 중에서 ‘노비’는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가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취급을 받으며 살게 된 것이다. ‘여자 ’노비‘가 애를 낳아서 계집이면 벼슬을 하는 양반의 시집간 큰딸 몸종으로, 사내놈이면 건너 마을 참판 댁 몸종으로, 쌀 두 가마에 넘긴다.’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바로 조선시대 ‘노비’문서이다. ‘노비’는 실질적으로든 양반인 주인에게 속해 있었으며 물건처럼 거래가 가능했다. 사람으로 취급을 아니 했기 때문에 부려 먹는 것 또한 엄청나게 포악하고 잔인했다. 농사일부터 시작해서 집안의 잡다한 일들, 심부름 등을 죽기 전까지 무보수로 일해야 했으며 ‘노비’가 마음에 안 들 경우 양반인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적 대우는 최악이었다. ‘노비’가 개인재산이라는 인식에 따라 양반인 소유자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였다.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는 관습이 조선후기까지 시행되어 한 번 ‘노비’가 되면 벗어나기 힘든 것이 그 당시의 사회적 현실이었다. 또한 이외에도 ‘노비’는 주인이 죄를 범해 받는 체벌을 대신 받기까지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와 달리 공(공적인)‘노비’의 비중이 축소되고 양반 계층에 예속된 사(개인적인)‘노비’의 비중이 컸다. ‘노비’가 조선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컸으므로 ‘노비’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나 양반계급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랜 옛날부터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타고 난 신분이 다르다고 믿었다. 특히 조선 시대에 이르러 유교적 신분 질서가 강하게 뿌리 내리면서 양반, 중인, 상민, 천민 계급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과거시험’을 통해 높은 벼슬에 오른 양반은 지배 계급으로 자신의 땅과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노비’를 비롯한 천민들은 나라와 양반들의 개인 재산으로 취급되어졌다. 모든 인간의 존엄과 보편적 인권이 중시되지 아니하였던 조선시대 양반계급 사회에서 ‘노비’제도는 지배층을 위한 최하위 신분제도의 하나였던 것이다. 예로부터 ‘노비’는 대대로 세습되었기 때문에 그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노비’는 문서로서 매매, 상속, 양도할 수 있었다. ‘노비’는 ‘노비’끼리만 혼인할 수 있었고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면 태어난 자녀는 당연히 ‘노비’가 되었는데 이것은 양반지배층의 ‘노비’ 수요를 충당할 수 있는 풍습이 되고 말았다. ‘노비’는 주인의 농사일,땔감조달,수공품제작,가사노동일 등을 했고 주인과 한집에 살거나 별도로 독립된 가옥에 살기도 했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조선시대 양반들은 계절과 날씨, 분위기 등에 따라 그에 어울리는 음식을 찾아 즐겼는데 양반들은 보통 하루에 5끼를 먹었다고 한다. 양반들의 식탁에는 기본 밥과 국, 육류, 생선류, 탕, 찌개, 전, 구이, 나물류, 김치류 등이 다채롭게 차려졌다. 노비들은 다섯 끼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동트기 전 이른 새벽부터 깜깜한 밤까지 꼬박 수고를 쏟아야 했다. 양반들에 비교하면 노비들의 의. 식. 주는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가정환경은 마치 ‘짐승우리’와 같았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공(공공기관)‘노비’와 사(개인)‘노비’로 나뉘어졌다. 공‘노비’는 중앙관청, 지방관청, 내수사, 궁방 등에 소속된 ‘노비’로서 노예와 같은 역할을 했다. 유럽 백인이 북아메리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원주민인 인디언 종족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나니 광활한 땅을 개발하기가 무척 힘들었는데, 그러니 유럽 백인들을 자본으로 유혹하여 아프리카 흑인들을 강제로 아메리카로 끌어와서 짐승처럼 부려먹은 사건이 노예제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민족끼리 신분에 의해 노예제도를 발전시켰으니 우리민족의 노예제도가 미국 보다 더 잔인하고 비참하다 할 것이다.
 조선사회의 신분계급은 일반적으로 양반(兩班)·중인(中人)·상인(常人)·천인(賤人)의 넷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체제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사회적인 전통 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서,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科擧), 음서(蔭敍), 천거(薦擧)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으며, 양반과 상놈을 가리는 신분의 차별은 곧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에 대한 차별이었다. 어떠한 학문의 학식이든지 사람 안에 쌓이면 반드시 교만을 형성하고 그 독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실속도 없이 복잡다단해진 학문의 양과 현실성 없는 학식의 질로 인하여 머리 좋은 사람과 집안 좋은 사람과 이런 저런 인맥 줄이 좋은 사람들이 학문으로 인한 출세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게 되고, 이러한 사회의 현상이 제도적으로 굳어져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기득권 양반세력 층과 아래로 처진 소외계층 사람들과의 격차가 모든 면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학식과 권력과 재물을 축적한 양반집단에서 큰 교만이 형성되며 그들이 입법과 사법과 행정 관직까지 대부분 차지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법도 만들고 제도도 바꾸어가며 더욱더욱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별의 별 짓을 다하며 사는 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양반들의 행위였었다. 양반계급만이 학문을 가까이 할 수 있었으며 천민이나 ‘노비’에게는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사회적 제도였으므로 ‘노비’들은 너무나 어리석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조선시대의 양반이라는 집단의 교만하고 허무맹랑한 존재들은 천민신분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멸시와 천대는 세계 역사에도 없는 가장 악질적인 인권유린의 참상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3천 년 이상 이어온 ‘노비’제도의 본질은 노예제 그 자체였다. 조선 지배층은 ‘노비’란 남자 종이나 여자 종(婢)일 뿐 노예(奴隸)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기자조선 때부터 삼한과 삼국.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3천 년 가까이 줄기차게 이어져온 ‘노비’제도의 본질은 노예제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천민은 팔천(八賤)이라고 하여 노비·기생·백정·광대·장이(대장장이·옹기장이)·승려·무당·상여꾼 등 8가지로 세분해 숨을 쉴 수 없도록 억눌렀다. 공‘노비’는 왕실과 관아, 사‘노비’는 양반가의 일꾼이자 몸종이었다. 내시와 궁녀는 궁궐과 왕실을 지탱했고, 관아를 뒷바라지하는 관기와 사환, 문무 잡직 모두 공‘노비’였다. 조선은 동족 ‘노비’에 의해 돌아가는 구조였다. ‘공자 왈 맹자 왈’하면서 무위도식하는 양반 선비를 ‘노비’들이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양반의 경제기반은 과전, 녹봉 그리고 개인 소유의 토지와 ‘노비’ 등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지주였으며, 주 수입원은 토지와 ‘노비’였다. 양반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노비’에게 직접 경작시켰으나 토지의 규모가 커서 ‘노비’의 노동력만으로 경작할 수 없으면 그 주변 농민들에게 생산량을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형태로 소작을 시켰다. 조선 전기에 양반들은 재산의 한 형태로 10여 명에서 많게는 300여 명이 넘는 ‘노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비’를 돈으로 사고팔기도 하였지만 주로 자신이 소유한 ‘노비’가 출산한 자녀는 ‘노비’가 되는 법에 따라 ‘노비’ 수를 늘리거나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혼인을 시켜 늘리기도 하였다.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물건처럼 매매. 상속. 증여가 가능했다. 사‘노비’는 최악의 피지배 계층이었으며 상전(주인)집 행랑채나 담 너머 집에 기거하면서 24시간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의 농사와 길쌈, 심부름,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여자 종은 출처에 따라 윗대서부터 전해 내려온 전래비, 당대에 사들인 매득비, 안주인이 시집올 때 데려온 교전비로 나뉘었으며 임무에 따라 정월 초하룻날 안주인을 대신해서 친척에게 세배하는 문안비, 초상이 나면 곡을 해주는 곡비, 문 앞을 지키는 직비, 안주인과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유모비가 있다. ‘노비’의 이름은 기구한 운명의 흔적이다. 동물이나 식물, 얼굴, 성격, 시간 등에 빗대어 흔하고 천하게 지었다. 개똥이(갓동이·실동이), 개떡이, 강아지, 똥개, 도야지, 두꺼비 같은 동물 이름은 물론 어린놈, 작은년, 뒷간이, 개부리, 소부리, 개노미, 개조지 같은 막말 이름을 붙였다. 물 긷는 물담사리, 소 기르는 쇠담사리, 똥 푸는 똥담사리, 붙어산다는 더부사리, 집 담에 붙어 있다는 담사리, 청소 전담 빗자리,(참조:2019.한겨레) 이름만으로 ‘노비’의 식별이 가능하고, 저항 의지를 갖지 못하도록 열등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양반들은 풍치 좋은 곳에 서당이나 정자를 짓고는 그것이 선비정신이라고 부추기면서 유학이니 실학이니 성리학이니 하면서 당쟁이나 일삼고 국가멸망의 지름길로 달려가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것이 조선시대 ‘금 수저’ 양반들의 역사에 길이 남을 비민족적이며 비국가적인 행위였고 그 결과 임진왜란으로 나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조선시대 ‘노비’와 현대의 ‘흙 수저’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이대로 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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