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 민족이 형성되어 온갖 영욕과 부침을 같이하면서 만년이 더 되는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 길고 긴 세월 속에 어찌 영광된 날만 있고 수난의 시대라고 비켜 가겠는가. 우리에게도 국권을 잃고 암울한 수난의 시대가 있었으니 잊을 래 야 잊을 수 없는 일제의 국권 강탈 시기이다. 이 수난의 시대에 민중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금지곡이니 희망의 소리, 광명의 소리, 역동의 소리, 민족혼의 소리, 생명의 소리, 부활의 소리, 이런 소리들은 아예 그 싹을 도려내었을 것이다. 노골적인 표현은 말할 것도 없고 비유적, 은유적, 함유 적 표현, 그 어느 것도 일제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고 눈에 잘 안 띠는 것도 비틀고 짜내어 기어코 그 ‘금지곡’ 딱지를 붙이는 데 혈안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 노예로 암울한 비극에 시달리던 이 시기에는 아무리 맑고 푸른 하늘을 보아도 조국을 빼앗긴 서러움을 털어낼 수 없었고 한 그루의 나무, 한 송이 들꽃을 보아도 서글픈 감정을 지워낼 수 없었기에 이 당시 노래들은 비탄조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우리 겨레가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가 ‘황성옛터’인데 망국의 슬픔을 은유한 노래로 왕 평 작사, 전 수린 작곡, 이 애리수의 노래이다. 열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한 전 수린은 언젠가 황해도에 순회공연을 나갔다가 배천 여관에 머물렀다. 어느 날 여관 뒷마당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교교한 달빛을 타고 흘러들자 문득 고향인 개성의 만월대가 처량한 모습으로 떠올라 그는 그 자리에서 이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처음에는 ‘황성(荒城)의 적(跡)’이라 하였다가 1933년 황성옛터로 고쳤는데, 당시 함께 순회공연을 나갔던 왕 평이 선율을 들어보고 가사를 달아 주었다. 이 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극장 단성사에서 연극 공연의 막간에 이 애리수가 이 노래를 불러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번은 이 애리수가 밀려드는 망국의 설움을 선율에 담아 이 노래를 부르면서 치밀어 오르는 오열을 참지 못해 3절 대목에서 그만 목이 메어 노래를 중단하고 말았다. 무대가수로서 이것은 큰 실수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관례대로 거듭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객석에서는 오히려 폭풍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재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연달았다. 이 애리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그런데 순조롭게 흐르던 선율이 어느덧 흐느끼면서 3절에 와서는 또다시 노래 반 울음 반이 되고 만다.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황성 옛터> 3절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노래를 듣는 관객들도 눈물을 것 잡지 못하였고 떠나갈듯 한 박수 속에 다시 재청이 요구되었다. 이 때 소개자가 나와 연극의 다음 막이 열리니 조용하기를 부탁 하였으나 관객들의 거듭되는 재청에 이 애리수는 다시 나와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러자 총독부 학무국 검열계는 이 곡이 사람들을 비탄에 젖게 한다는 이유로 ‘금지곡’ 딱지를 붙여 이 후로 못 부르게 하였다.
 민족 수난기에 창작된 대부분의 비가들은 우리의 민족 감정을 반영하여 어질고 근면하며 순진한 생활감정을 담고 있다. 이 바탕 위에서 외세 강점 하에서도 애국적 감정을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부식시킨 염세 가요는 사람들을 무상감에 젖게 하며 소외감과 좌절감, 체념과 비관으로 인간을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마약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일제는 조선인의 애국적 감정을 거세하고 사람들을 비관의 희생물로 만들기 위하여 ‘무정한 달’ ‘애수의 황혼’ 과 같은 수많은 염세 가요들에 ‘유행가’라는 분칠을 하여 민간에 부식시켰지만 사람들은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또한 일본의 일류 명가수들이 취입한 노래 레코드들이 도시 중심의 축음기 상가에 출시되었지만 사는 사람들이 없어 상점들이 자금난으로 아우성을 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일제가 부식시킨 노래들은 생명력을 지닐 수가 없게 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요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면서 서울 안국동 네거리의 레코드 상점은 가요인들의 울분과 원한이 서린 눈물의 장소가 되었다. 1930년대 초에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 온 이 면상은 처녀작 ‘들국화’를 창작하여 채 규엽이 이를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취입 하였는데 이 곡이 나오자마자 학무국 검열에 걸려 레코드가 모두 수거되어 구둣발에 짓밟혀 깨어졌다. 작곡가 이 면상은 자기의 처녀작이 레코드가 되어 나왔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축음기 상점으로 달려갔다가, 그런 장면을 보고 놀라지 앙ㅎ을 수 없었다. 그는 마당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있는 깨진 음반 조각들을 움켜쥐고 식민지 민족의 설움을 토해내며 통곡하였다. 이것을 본 레코드 상점 주인은 울고 있는 청년이 금지곡 처분을 받은 ’들국화‘의 작곡가임을 알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백일홍은 피었다가 시들었는데 들국화야 너의 웃음 해맑기도 해라
 맑고 푸른 하늘이 너의 넋이냐 낙엽 지는 산과 들에 웃음 덮어라
 붉은 단풍 가지마다 낙엽 지는데 들국화야 너의 웃음 가을의 노래
 수정처럼 맑음이 너의 얼이냐 깊어가는 이 가을에 웃음 덮어라

 일제가 이 노래를 탄압한 것은 우국지사로 자처하여 언제나 애국을 떠벌리던 사람들이 일제에 투항하여 가을날의 낙엽처럼 시들어 질 때에도 변함없이 마음속에 조국의 넋을 지켜가는 사람들에 대한 찬양이 은유적으로 노래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낙엽 지는 산과 들에 웃음 덮어라’고 한 서정적 시어에 감추어진 조국이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되어 금지곡이 된 것이다. 가수 채규엽(蔡奎燁)은 누구보다 일제의 탄압을 많이 받은 가수의 한 사람이다. 맑은 음색과 독특한 창법을 지닌 채규엽은 우리나라 가요가 서정가요가 주류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작곡가들에게 서정 가요를 창작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채규엽 이외에도 ‘아리랑’을 부른 채동원도 금지곡 처분을 받았고, 전수린 작곡인 ‘ 빛 잃은 강산’과 ‘한숨 고개‘도 매장 되었으며, 전옥(全玉)이 부른 ’앞 남산에서‘, ’이역에 우는 꽃‘도 금지곡이 됐다. 작곡가와 가수들이 생계를 유지하자면 레코드에 자기 노래를 싣는 길 밖에 없는데 그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민족 수난기에 창작된 ’대중가요‘란 용어는 대중이 즐겨 부르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 또 이 대중가요가 급속히 유행을 탄 데서 ’유행가‘라고도 하였다.
 역동의 힘을 받아 희망찬 발걸음의 재촉할 때에도, 다른 한 편으로 수난의 발자취 또한 쉽게 잊어서는 안 될 일일 것이다.


 ※ 본 칼럼은 故서재순 본지 논설위원이 미리 보내주신 유작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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