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서둘러 강화를 떠난 것은 개경 정부의 공격을 피하고 새로운 거점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진도를 거점으로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진도가 육지에 인접해 수시로 본토를 드나들며 대몽 항쟁을 벌일 수 있다는 점이 그 첫째다. 또한 울돌목이라 부르는 내륙간 해협은 이 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대첩을 거둔 곳으로 물살이 워낙 거세어 수전으로 몽고가 쉽사리 쳐들어 올 수 없다는 이점도 있었다. 또한 진도는 경상. 전라의 조운선(漕運船)이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이기 때문에 이곳을 차단해 개경에 경제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로부터 진도는 한 해 농사로 3년 동안 먹고도 남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옥한 섬이었다. 이런 이점들이 진도가 삼별초의 거점이 된 것이다. 진도 동북쪽 벽파진으로 들어 온 삼별초는 가까이 도성 자리를 정하고 용장산성을 쌓았고 그 외의 유적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삼별초가 고려라는 국호를 바꾸지 않고 고려라고 칭함은 자신들이 정통 고려 정부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들은 몽고의 연호도 사용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별초는 표류한 일본인들을 돌려보내어 우호를 표시하면서 수 만 명의 지원 병력을 요청한 일도 있으니 일본과 연합해 몽고와 맞서려고 하였던 것이다. 삼별초는 황제의 명이라 하여 본토에 진출하여 곡식을 거두어 들였고 그들의 왕을 황제라 칭하면서 대몽 항쟁을 위한 경제적인 기반을 쌓아갔다. 몽고가 삼별초를 회유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 올 때에는 진도를 독립정보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돌려보내었다. 삼별초는 워낙 정예의 군사들로 조직된 데다 몽고와 오랜 전쟁을 치르며 풍부한 전투 경험을 쌓은 데다 강화를 떠난 천 여 척의 배들 중에는 군선이 많았다. 뛰어난 선박 제조 술을 근간으로 수군이 포함된 삼별초는 막강했다. 고려사에서도 삼별초의 초기에는 개경 정부가 삼별초의 수군을 당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별초는 전투할 때 징과 북을 동원했고 괴상한 동물을 함선에 그려 바다에 비츠는 등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이는 심리적으로 적을 먼저 제압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전술에도 능했고 사기도 높았다. 다량의 선박을 보유하고 해전에 능했던 삼별초는 그 막강한 전투력으로 남해 연안을 장악해 나아갔다. 그들은 나주, 전주 장흥 등을 차례로 공격해 전라도 전체가 삼별초의 세력권에 들어오면서 입지를 강화한 다음 제주의 관군을 패퇴시키면서 제주를 후방 기지로 삼았다. 이 후 남해를 거점으로 경상도로 진출하였다. 이 때 일본 정벌을 앞두고 있던 여. 몽 연합군의 전초기지인 마산, 김해, 동래로 진출해 들어갔으니 몽고와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남해 연안에는 당시 삼별초의 세력권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 남아있다. 특히 강진 관찰 봉에 그 흔적이 뚜렷한 연해 장성이다. 이성이 진도에서 강진을 지나 장흥, 고흥에 이르고 경상도 연안까지 이어진다. 유적과 기록을 토대로 연해 장성을 추적해 보면 그 범위가 삼별초 세력권 내에 있음을 보여준다. 삼별초는 이렇듯 남해의 섬들과 연안을 확보하고 제해권을 장악해 나간 것이다.
1271년 1월 밀성(밀양) 사람들이 봉기해 부사를 죽이고 인근의 청도와 선산까지 진출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명분은 진도의 삼별초를 따르자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개경에서도 반란이 모의 되었다. 관아의 노비들이 무리를 모아 관리자를 죽인 뒤 진도에 투한하려 했던 것이다. 개경의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인천 아바다의 대부도에서도 반란을 일으켜 이곳에 주둔 중이던 몽고 병들을 살해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그만큼 각지의 민심은 진도의 삼별초 정부에 쏠려 있었다. 진도 굴포리 일대에는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의 사당이 있는데 매년 정원 보름이 당제를 지낸다. 이 역시 삼별초에 대한 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삼별초가 이처럼 민심을 끌어당긴 것은 봉기 직후 정부 문서를 불태우며 노비 문서를 없앤 사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비 문서를 태운 것은 신분 차별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니 양민과 노비들의 호응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별초의 이 정책은 전쟁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외세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위기 상황에서 신분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 구심점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반란 집단을 넘어 고려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몽고로부터 국토를 지키고 민중에 의한 새로운 사회를 지향했던 삼별초는 그야말로 고려의 또 다를 정부였던 것이다. 1271년 5월 15일 병선 400척과 1만이 넘는 대 규모 여. 몽 연합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온 것이다. 삼별초는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고 용장성은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용장 성을 버리고 배중손은 남도진으로, 김통정은 왕을 호위해 금갑진으로 퇴각했다. 도중에 왕이 죽고 남도진으로 퇴각한 배중손의 부대는 전멸했다, 김통정은 잔여 세력을 이끌고 제주로 떠났다. 삼별초가 이처럼 쉽게 무너진 것은 초기에 진도 정부의 힘이 개경 정부를 압도하면서 방어 능력을 과신한 점, 정보를 탐지한 여. 뭉군의 기습전략, 그리고 연합군의 신무기인 화약 투입 등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제주로 옮긴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항몽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현재 항몽순의비(抗夢殉義碑)가 서 있는 제주 항파두리 성이 그들의 방어진인데 석성으로 견고하게 쌓은 성이다. 그들은 다시 해상활동을 통해 본토의 연안 공격으로 나아갔다. 이들 삼별초는 전라도와 경상도는 물론 충청도와 경기도에 이를 만큼 영역을 넓혀 갔으나, 그들이 제주로 온지 3년 만에 다시 여. 몽 연합군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고구려 이후의 다물 정신의 계승이라 할 수 있는 삼별초의 호국 정신이 우리에게 면면히 흐르는 한 이 겨레는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