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진(秦)이 망한 다음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천하쟁패에서 한(漢)의 유방이 초(楚)의 항우를 꺾고 이겨 대권을 움켜 쥔 다음 개국 공신들에게 전국의 지역을 분봉해 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공신 팽월(彭越)이 받은 양(梁) 나라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양 나라에 난포라는 사람은 양 왕 팽월이 평민이던 시절부터 서로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었다. ‘어려울 때 자신을 욕되게 하거나 뜻을 굽히지  못하면 사내대장부라 할 수 없고 부귀를 누릴 때 만족하지 못하면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난포는 남의 집 고용살이를 비롯하여 술집 점원, 도적, 노예 등 온갖 고생을 다하였으며, 뒤에 노예로 있던 주인의 원수를 갚아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연 나라의 장군으로 까지 승진하였다. 한 나라 초에 연 나라 왕 장도가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난포는 포로가 되었다. 이 때 난포는 양 왕 팽월의 도움으로 사면을 받아 팽월 밑에서 대부로 일하게 되었다. 난포가 양 나라 사신이 되어 제 나라에 간 사이에 팽월이 모반죄로 목이 잘리어 낙양 성 아래에 기시(棄市)되었다. 고조 유방은 누구든 팽월의 머리를 거두는 자가 있으면 바로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제 나라에서 돌아 온 난포는 팽월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다녀 온 일을 보고한 다음 팽월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통곡하였다. 이 일로 난포는 유방 앞으로 끌려갔고 유방은 난포를 끓는 물에 삶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난포는 죽기에 앞서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폐하께서는 팽월에게 출병을 명했을 때 팽월이 신병으로 출병치 못한 것을 모반으로 단정하여 가혹한 판결로 그를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신이 걱정하는 바는 공신들이 모두 위태롭게 느끼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제 팽월이 죽었으니 신은 살아 있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어서 삶아 죽이십시오.’ 머뭇거리던 유방은 난포를 죽이지 못하고 그를 도위에 임명했다. 나중에 일곱 제후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 장군에 된 난포는 반란군 평정에 큰 공을 세웠다.
 인생이란 죽음을 초월해 나가는 전쟁이다. 이 전쟁터에서 인간은 여러 가지 형태나 방식으로 그 도달점인 죽음을 향해 삶과 맞서 싸운다. 그 싸움의 과정과 결과가 죽음의 질을 결정한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나들며 자신의 가치를 축적해 나간다. 삶이 위대할 때 죽음이 영광스러워지고 삶에 의의가 클 때 죽음에 값어치가 커진다는 데서, 삶과 죽음이 분리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려 한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한다. 죽음 자체를 혐오하는 성향이 강하고 보니 역으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인 삶 그 자체의 질을 확보하기 보다는 죽음의 뒤처리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왜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뇌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격을 잃고 살고 있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의 천하통일 보다 수백 년 앞서는 춘주시대에 진(晉) 나라의 공자 중이는 왕위를 이어 받지 못한 채 19년에 가깝도록 외국으로 떠돌아 다녀야 했다. 나중에야 진(秦) 왕(목공)의 도움을 받아 고국인 진(晉)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춘추 오패 중 한 사람인 진문공(晉文公)이다. 진문공이 제위에 오르면서 먼저 행한 일은 논공행상이다. 진문공이 권좌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에게 상급이 돌아갔지만 오지 한 사람, 진문공이 돌아다니다가 굶어서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국을 끓여 와 진문공의 허기를 면하게 해 주는 등 19년 동안 동행하며 시중을 들어 온 개자추(介子推)만 빠져 있었다. 그의 이웃에 살던 해장(解張)이라는 사람이 개자추를 찾아가 공신으로 추가 신청 할 수 있게 되었다며 다그쳤지만 그는 웃기만 할 뿐 답이 없었다. 개자추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 아들에게 말했다. ‘한 번 가 보아라. 나는 19년 동안이나 주공을 모시고 방랑하지 않았느냐? 더구나 지난 날 넓적다리 살점까지 내어서 임금께 잡숫게 하지 않았는가. 너의 고생도 적지 않았는데 왜 가서 말하지 않으려고 하느냐? 짚신을 삼아서 파는 것 보다 낫지 않겠느냐 ?’ 개자추가 답한다. ‘돌아가신 진헌공은 아들 아홉 분을 두셨습니다. 그 아홉 분 중 오직 우리 주공께서 가장 어지셨습나다. 지금의 주공이 권좌에 오른 것은 덕 있는 자에게 돌아가는 하늘의 뜻인데 모든 신하들이 자신의 공인 양 하고 있으니 그런 공이란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제 임금께 요구할 것이 없는데 무슨 일로 궁에 가겠습니까 ?’ 그 날로 개자추는 어머니의 뜻대로 어머니를 등에 업고 면산(綿山)으로 갔다. 그리고는 거기에 초려(草廬)를 지었다. 그는 풀로 옷을 해 입고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서 일생을 마칠 작정이었다.
 개자추의 이웃에 살던 해장이 진문공에게 개자추의 일을 알리자 그제 서야 개자추가 공신 록에서 빠진 것을 알았다. 진문공은 개자추의 행방을 아는 해장과 함께 면산으로 가 보니 산 봉우리는 첩첩하고 풀과 나무는 가득 들어찼고 흐르는 물은 잔잔하고 구름은 조각조각 흘러가고 숲 속에서 새 소리만 요란했다. 진문공은 군사들을 풀어 며칠이고 산을 뒤졌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산에다 불을 놓으면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불을 놓았다. 불길은 사흘 동안이나 타고는 꺼졌다. 불이 탄 자리를 더듬어 보니 개자추는 어머니와 안고 버드나무 밑에서 타 죽어 있었다. 군사들은 그 해골만을 거두어 돌아갔고 진문공은 한 없이 울었다.
 산에다 불을 지른 날이 3월 5일이며 절기로는 청명(淸明)이었다. 진 나라 사람들은 개자추를 추모하기 위해서 해마다 3월이 되면 일체 불을 피우지 않고 한 달 동안 찬 음식을 먹었다. 후대로 오면서 찬 음식 먹는 날이 줄어들게 되었고 청명의 하루 전 날을 한식날(寒食節)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개자추를 사모한 시가 있다.

초라한 행색으로 열국을 방랑한 지 19년.
하늘 끝까지 돌아다니면서 임금을 모셨도다.
살을 베어 임금을 먹였으니 그 마음 참으로 지극하며.
벼슬을 사양하고 불 속에 타 죽었으니 그 뜻 견고했도다.
면산(綿山) 높이 오르는 저 연기는 그의 기상과 절개를 보여 주는 듯
면산의 장엄한 사당은 그의 충성과 어짊을 나타냈도다.
오늘도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으며 슬퍼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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