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이 사회에는 흔치 않게 상대방의 자존심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본인의 자존심만 중시하여 반드시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하려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인간관계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 고지식하거나 고집 센 사람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여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다. 일반적으로 대의나 원칙을 두고 고집하는 사람을 두고 고집이 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원칙주의자 또는 큰 그릇으로 높은 찬사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고도 보통의 경우다. 반면에 사소한 내용이나 상황에 맞지 않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사람을 두고 고집이 세다고 말한다. 이처럼 고집이 센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경직된 사고로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힘이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영향력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따르지 않는다. 더 이상 그를 따르게 할 명분이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유연한 사고와 추진력을 가진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따르게 하는 리더십이 풍겨 나오게 되어 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때 고지식해 질 수가 없다. 주어진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한 후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변화를 외면하는 것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상대를 존중함은 물론 자신의 자존심을 높여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생각이 유연할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쉽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도 쉽다. 생각이 유연할 때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고, 다양한 변화의 체험을 통해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느 특정인 또는 특정 집단이 유연한 사고를 가졌더라도 소통문제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한다면 매우 곤란한 일일 수밖에 없고, 경우에 따라 그로인해 개인이든 집단이든 존망의 위기로 내몰릴 수도 있게 된다.

 진시황은 언론을 통제하고 사상을 탄압하는 정책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사상 서적을 압수해 불태우고 지식인들을 생매장 했다. 이 때 가국의 역사서는 물론 민간인이 개인적으로 보관해 오던 책과 제자백가의 저작물 까지 모두 압수하여 잿더미로 만들었다. 진시황의 이런 강압정치에 사람들이 분노했지만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었으니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당장 목이 달아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 나라의 국가 체제는 탄력성을 잃고 얼마 안 가서 멸망하게 된 데에는 지나치게 언론을 통제한 이유가 그 첫째가 된다. 권력이 지나치게 진시황과 그의 측근 에게 집중됨으로써 많은 신하들이 토론에 참여하지 못했고 정책 결정의 장단점을 논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환관 조고는 그의 해박한 법률 지식으로 진시황에게 발탁되어 늘 권력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그는 정보와 언론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그 정보와 언론이라는 통로를 이용하여 2세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을 잘 아는 그에게도 맹점이 있었으니, 권력이란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며 균형을 이룰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그는 호해 황제에가 말했다. ‘앞 황제께서는 등극하여 오래 다스렸기 때문에 군신들이 감히 그릇된 짓을 하거나 사악한 말을 올리지 모했습니다. 지금 폐하는 젊으신 데다 이제 막 즉위하셨는데 어찌하여 조정에서 공경들과 더불어 국사를 결정하려고 하십니까 ? 일에 잘못이 있으면 군신들에게 폐하의 단점을 보이게 됩니다. 천자가 짐(朕)이로고 칭하는 것은 본래 천자의 소리를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을 옳게 여긴 황제는 모든 국사를 조고의 손에서 처리할 권한을 주었다. 조고는 정보를 장악하여 멋대로 정권을 가지고 놀았다. 2세 황제 호해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각지에서 농민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다급한 상황을 알리는 급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속속 중앙으로 올라왔으나 나쁜 소식을 황제에게 보고하는 사람은 조고에게 즉시 처벌을 받았다. 조고는 반란을 진압했다는 소식만을 황제에게 보고했고, 황제는 조고에 의해 철저하게 걸러지고 왜곡된 일방적 정보만을 제공 받았다. 심각한 정세를 전혀 깨닫지 못한 황제는 그저 진시황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아방궁(阿房宮)을 짓는 데만 열중할 뿐이었다. 반란은 점차 확대되어 전국으로 퍼져갔다. 이미 진시황 당시부터 전국적으로 들끓던 반발 세력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세력을 키워 나갔고, 함곡관 동쪽지역은 모두 진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해버렸다. 거기다 철석같이 믿었던 조고가 반역하여 병력을 이끌고 궁으로 난입하자 2세 황제 호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고는 시황제의 맏아들인 부소의 아들 자영을 황제로 올렸으나, 그 조고는 자영에게 죽고 3세 황제 자영은 즉위한지 46일 만에 함양성에 입성한 유방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말았다.

 소통을 위해 통치자는 정보를 장악해야 하고 정보 장악을 위해 소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절대 권력을 기반으로 하는 제왕 체제하에서나 현대의 자본주의 체제이거나 다를 것이 없다. 리더에게서 마음의 귀가 열렸을 때 그는 늘 성공하였다. 그 귀를 닫았거나 그 귀가 없었던 리더는 예외 없이 실패했던 것이 역사의 냉엄한 법칙이다. 대체로 천하를 아우를 때에는 계략이나 무력이 주요하나 안정되었을 떼에는 권력이나 힘의 균형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천하를 얻는 것과 지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진 나라가 전국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을 바꾸지 않고 정치를 개혁하지 않았으니 천하를 얻고도 지키는 방법을 달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홀로 고립된 채 천하를 다스리려 했으니 그 멸망이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빨리 다가온 것이다. 평화는 통일을 전제로 하지만 물리적 통합만으로는 지속이 될 수 없다. 백성들에게 먹고 입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좀 더 섬세하고 효율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금이 갈 수 있는 것이 평화의 속성이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통치인 것이다. 통일은 단순하지만 통치는 복잡하다. 통일에는 물리력이 많이 작용하지만 통치에는 복잡한 화학적 작용을 크게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진의 정책은 매우 진보적이었으며 역사적 흐름에도 부합하는 정책이었다. 문제는 너무 서둘러 공을 세우고 성급하게 결과를 보려고 했던 진시황과 그의 측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다음 민심과 각지의 풍속 및 습관을 제대로 살펴 순리대로 다스렸더라면 진 나라는 훨씬 더 오래 갔을 것이다. 유연성과 소통의 중요성이 고금을 통하여 다름이 없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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