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인류의 발원지에 대하여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여 단정을 짓지 못하고 있다. 유력 후보지로는 파미르고원과 몽골의 사막이 있는데 그 어느 곳이든 우리 조상들이 발원했거나 이주해 온 발자국을 말해주고 있어서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옛 말로 추적해 보면 왕성(王姓)을 해(解)라 하였으니 태양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고 왕호(王號)를 불구내(弗矩內)라 함은 태양의 빛에서 듯을 취한 것이며 천국(天國)을 환국(桓國)이라 함은 광명(光明)의 뜻을 취한 것이니, 우리 조선족은 서방 파미르 고원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不咸山 해와 달이 드나든다는 지금의 백두산)을 광명신이 머무는 곳으로 알아 그 곳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였으니 곧 광명이라는 뜻이다.
 인간 삶의 초기인 원시시대에는 강의 물고기와 산과 들의 짐승과 풀, 나무 열매와 같은 천연산물을 양식으로 이용하다가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에서 얻는 천산물(天産物) 만으로는 부족하여 이를 보충하기 위한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해 갔다. 농업은 대개 불의 힘을 이용하여 초목울 태워 들을 개척한 뒤 그 야지(野地)를 이용하였으므로 이를 ‘불(부=벌=野地’) 또는 ‘벌판, 벌’이라 불렀다. 인간에게 불의 발견이란 대단한 생활의 혁신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놀라운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불의 발견으로 인간의 생활용품인 토기, 석기, 청동기, 철기 등의 발전을 일구어 나가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 조상의 나라인 조선(단군조선)이 막을 내리고 해모수가 세운 부여를 거쳐 삼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에 있던 지금의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가야 연맹라고 하는 여섯 나라의 연맹체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쇠(鐵)가야 또는 소가야인데 이 중 소가야란 국호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나라 이름인데, 가야 연맹이 신라에 병합되고 난 뒤 수 백 년이 흐른 고려 말기에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지금 고성을 중심으로 존속하던 가야를 소가야로 명명한 것이 그 처음이다. 개인의 이름에도 작을 소(小)자를 붙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인데 하물며 나라 이름을 소가야라고 지었을 리는 없고 다른 나라에서 소가야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있다. 소가여의 강역은 고성, 사천, 남해, 통영, 거제이니 다른 가야 연맹에 비해 크기로는 아주 작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야 연맹의 강역은 낙동강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문경, 의성, 대구, 경산, 양산 에 이르고 서쪽은 지리산 구례에 이르렀고 남쪽우로는 왜국까지 이르러 500여 년간 강국을 이루었다. 고유한 신선도의 실천과 불교의 전래 등으로 문화적 기반을 위에 비옥한 농토를 이루며 풍요로운 해산물 생산과 철기문화의 발달로 주체적 역사를 일구어 내었으나, 더욱 강성해진 가야가 신라의 왕성인 경주를 점령하고 신라가 가야에 합병 될 위기에 처했을 때,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5만 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가야 군을 무찌르자 큰 타격을 받은 후,  나중의 승자가 된 신라에 의한 패자멸시에 기반 둔 사대사상과 식민사관으로 일관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가야의 흔적마저 말살되어 있다. 가야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이었고 발전의 원동력을 제철업이었다. 가야 지역은 태평양 연안에 접해 있어 대륙붕이 발달하고 항만과 도시가 발달되어 바다 자원을 이용한 수산업이 발전하였다. 철기 생산과 해산물 생산이 교역의 주된 품목이 된 것이다. 이 때 주요 교역 대상국이 왜국인데 당시 왜국의 철의 대량 생산이 불가능했고 또 그럴 기술이 없어 전적으로 가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철정의 제조 과정은 1,200도 C의 고열에서 선철(銑鐵)로 사강을 생산하는 기술적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그들에게는 교역만이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그 해로는 주로 구야한국(김해)에서 대마도, 이키, 이도국에 이르는 해로가 주로 이용되었다. 특히 대마도를 통하여 야마대와 구주로 가야 인 들이 건너가고 문화를 전해 주었음은 두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 돌,이나 토기, 철기 등을 통하여 증거 해 주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국제 교역이 산업의 중요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천 여 년 전에도 산업발전과 더불어 먼 거리간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일본까지의 교역로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를 시험한 결과 한반도에서 아무 동력 없이 조류(潮流) 만으로 일본으로 갈 수 있음을 밝혀내었다. 지금 고성의 이웃인 사천에 늑도(삼천포항)라는 섬이 있다. 이곳이 철의 산지는 아니지만 2천 년 전 후 시기에 한 반도에서 가장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곳이자 특히 철의 교역이 활발한 국제 무역항이었다. 이 늑도에서 출토된 철제품은 대부분 생활용품인데 아무리 교역선이 드나드는 무역항이라 해도 무덤의 부장품 정도로 밖에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사정으로 보아 늑도에서 철제품이 나온다는 건 예사롭지 않다. 늑도에서 철 생산이 없었다면 고성, 산청, 밀양, 김해, 창원, 경주, 대구 등지에서 늑도로 유입 되었을 것이다. 이 늑도는 육지의 문물, 특히 철제품을 모아두었다가 해상으로 전달해 주는 물류 센터이자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을 잇는 중개 무역 지 역할을 한 것이다. 늑도에서 가장 가까운 내륙인 사천은 섬진강, 남강, 낙동강 줄기를 뻗어나간다. 섬진강을 타면 전라, 충청 지역으로 들어가고 금강이나 낙동강을 따라가면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천은 육로와 해상을 잇는 사통팔달의 요충지였고 그 해상의 요충지가 늑도 였던 것이다. 남해안에서 가장 조류가 센 곳이 명량이고 그 다음이 늑도다. 이 늑도로 진입하기에는 유속이 센 대방 수로를 이용한다면 옛날 배들이 그냥 지나다니기엔 상당히 위험한 유속이다. 당시 배들이 빠른 유속의 대방수도를 피해 늑도 쪽으로 향했다. 급한 물살을 피해 갈 수 있는 안전한 해로와, 배를 정박한 다음 항해를 준비할 수 있는 주변의 포구가 형성되어 갔다. 늑도는 이렇게 주변 조류를 이용해 교류와 방어를 동시에 이루어 내며 천혜의 국제 무역항으로 성장해 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항해 기술이 발전하고 교역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늑도는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갔다. 더 큰 배들이 드나들 수 있는 항구가 그 역할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철기문화가 점점 발전하면서 정치, 경제적 중심이 낙동강 일대로 넘어 간 것이다.
 이처럼 2 천 년 전에도 이 곳 고성에서도 교역이 활발했고 그 중에서도 늑도가 큰 역할을 담당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