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세상사란 어두울 때가 있는가 하면 어느덧 밝음이 찾아오고, 암울한 세월인가 했더니 어느덧 기쁨이 찾아오고, 끝없이 비가 오는듯하더니 어느새 화창한 날이 오듯 모든 것이 변하게 되어 있다. 옛 날 중국이나 조선이나 모두 매(昧)라는 글자는 자전(玉篇)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어두울 매(昧)자이다. 어두움은 곧 태양이 떠오르는 광명으로 변한다는 말이니 이 ‘매’자는 해(日)가 높은 나무에 내려 온 형태를 상형한 글자다. 원래의 나무(木)에서 큰 가지가 더 추가 된 글자 미(未)로 분화 되었으니 이 ‘미(未)’가 큰 나무 또는 신성한 나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태양신이 높고 신성한 나무 가지에 내려오기를 기원하는 놀이가 있었으니 이를 ‘매(昧)’라고 한 것이고, 천손족인 우리 민족이 태양신을 신목(神木)위로 모셔 내리는 행사가 음악이자 ‘매’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무를 통한 신맞이 가무를 매(昧)라고 한 것이며, 우리나라의 곳곳에 매봉, 매봉산, 매 자리, 매 놀이 깨 등 매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옛 사람들이 신맞이 원무(圓舞)에 연관된 말이다. 매암 돌다, 매통, 맷돌 등이 모두 원무를 추듯 맴도는(回傳) 모습과 연관되며, 그냥 매(昧)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즐겁게 맞이하는 굿을 겸한 신맞이이니 ‘매 굿’이 되었고, 나중에는 이 ‘매 굿’에서 ㅅ이 떨어져 나간 ‘매구’로 되어 아직도 농촌에 남아있는 매구(農樂)가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 조상에게 음악이란 신목을 통하여  태양신을 지상에 모시고 내려와 그 태양신을 기쁘게 하면서 신과 더불어 대화하는 축제의 장을 만드는데 필요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오랫동안 민요형태 또는 궁중음악 등의 형태로 이어져 오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일제의 황국시민화(皇國市民化)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유행가’란 이름으로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기에 이르렀다. 전통음악과는 단절의 시대가 갑자기 찾아 온 것이다. 그들은 내선일체(內鮮一體)니 대동아공영(大同亞共榮)을 피비린내 나게 소리높이 외쳐대던 가운데 그들이 말하는 ‘국민가요’가 우리 음악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과정인 대중가요의  첫 출발이 된 것이다. 이 대중음악은 자본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신화를 재생산하는 체계중 하나로 자리 잡아 갔다. 다양한 대중들의 다양한 기호를 아우르기 위해 대중음악은 그 자체의 개체 발생과 계통발생의 역사가 필요했으니, 보다 고도의 상품화 과정에 자본주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탄한 사회체제 이행(移行)에 따르는 문화적 자발성과는 거리가 먼 식민지 지배와 정치적 맥락에 따라 급격한 이행과정을 밟아 간 것이다. 한국은 일본 문화산업의 식민지 사장 기능을 면할 수 없었고, 자체 자본이 없는 상태였기에 해방 후 단 한 장의 음반도 만들 수 없는 국면을 피할 길이 없었다.

 해방 후의 상황이 그 정도라면 일정시대에는 그 어려움이 더하면 더했지 나았을 리는 없다.
 1930년대, 이 시기에 나온 대표곡으로는 ‘영자야 가거라’, ‘사랑도 싫소 돈도 싫소’, ‘간 곳마다 괄세더라’, ‘꼬집힌 풋사랑’, 타향술집‘, ’비오는 청등가‘, ’흐르는 주막‘, ’만약에 백만 원이 생긴다면‘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나온 노래로 조 영출(조 명암) 작사 이 면상 작곡 이 규남 노래로 ’진주라 천리 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가 나온 이후 진주에 처음 가보는 사람들은 촉석루에 올라 이 노래를 불러 보고야 갈 길을 가곤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참으로 그 시기에 진주에 가서 교교한 달빛이 물에 어린 남강을 바라보노라면 나라 잃은 설움과 회한이 저도 모르게 가슴에 젖어들곤 하였다. 더욱이 진주는 16세기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의병장 김천일과 진주 방어서  최 경회와 황진 등을 비롯하여 이 땅을 지킨 선조들의 넋이 애국으로 자랑스럽게 피어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음을 생각할 때 누구인들 어찌 비통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진주의 서장대(西將臺), 북장대(北將臺)등 어디를 바라보아도 나라 잃은 처절함이 저절로 안겨든다. 특히 촉석루에서 의암(義巖)으로 내려서면 적들과 용감하게 싸우다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한 의병장 김천일과 적장을 그러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의기(義妓)논개(論介)의 넋이 원한으로 사무쳐 오는 듯하다. 이 애통함을 달래 줄 노래가 그 때 까지는 없었다. 설사 애국적인 감정을 반영한 노래를 만든다 해도 당시 일제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으니 노골적인 애국적 감정을 담아 낼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진주에 온 이향민(離鄕民)의 서러운 처지를 하소하는 ’진주라 천리 길‘로 이들의 달래주는 유일한 노래가 되면서 이 노래가 진주에서 크게 유행하다가 전국으로 급속히 큰 유행의 물결을 타기에 이르렀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이 규남은 1929년 경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에서 고학을 했다. 그의 전공은 피아노인데 두 달이나 학비를 내지 못하여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는 학비 마련을 위해 신문 배달과 운송점의 하역노동도 하였지만 학비는 고사하고 자기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어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그 때 서울에서 콜럼비아, 빅타, 포리돌 등 레코드사가 신설되고 있었으므로 그 중 그는 콜럼비아 회사에 입사하였다. 하지만 그가 전공한 피아노 연주는 할 수 없었으니 회사가 자금난으로 피아노를 구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득이 가수가 되기는 하였으나 마음에 드는 곡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만들어진 노래의 질이 낮아 한 곡도 유행을 타지 못하자 가수의 역량이 모자란다며 타박만 주었다. 그는 회사를 사직하고 음악학교를 만들어 보려고 모금운동을 벌여 보았으니 잘 되지 않았다. 모금한 돈을 다 돌려주고 나니 생계가 막막해졌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뜨내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친구의 주선으로 진주에 있는 한 레코드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장터에 나가 음반에 취입된 노래를 부르며 레코드를 팔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장터에서 지방 순회공연차 진주에 온 친구 이 면상을 만나게 되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군, 피아노만 전공한 줄 알았더니’ 하면서 마침 유능한 가수를 구하고 있던 중이니 친구인 자네가 해 보라며 ‘진주라 천리 길’의 악보를 건네받은 그 날 밤 이 규남은 촉석루에 올라 달빛 어린 남강을 바라보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촉석루에서 이 노래를 부르니 악상에 담긴 선율과 가사의 내용이 꼭 자신의 처지와 같이 느껴졌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며 감정이입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이 노래 이후 일약 명가수로 거듭 나게 되었다.


 진주라 천리 길
          (조 명암 작사, 이 면상 작곡, 이 규남 노래)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가
 촉석루의 달빛만은 나무기둥을 얼싸 안고
 아 타향살이 이 심사를 위로할 줄 왜 모르나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가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소리를 들을 적에
 아 타향살이 설움인줄 내 어이 몰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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