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심기원, 김자점, 최명길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창의문으로 들이닥쳤다. 반정 군이 수비군의 목을 배고 성 안으로 들어가 북 소리를 울리면서 앞으로 나아가 창덕궁에 이르렀다. 대궐 안에서는 이 흥립이 도감 병을 거느리고 진을 치면서 반군을 도왔다. 반정군은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입성했다. 반정군은 돈화문을 도끼로 찍어 열고 들어가 쌓아 둔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자 불빛이 대낮처럼 밝았다. 광해군은 불빛을 보고 내관에게 말했다. ‘역성이라면 먼저 종묘에 불을 지를 것이고 폐립이라면 종묘는 무사할 것이다.’네가 높은 데 올라가 바라보아라.‘ ’전하 종묘에 불빛이 있사옵니다.‘ ’이 씨의 사직이 내게 이르러 끝나는 구나‘ 공해군은 내관과 더불어 북문으로 도망쳤다. 능양군이 돈화문 문루에 앉아 서 궁의 인목대비에게 알리고 모셔 올 준비를 했다. 반정은 큰 살상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광해군의 눈을 속이고 귀를 막은 간신과 권신들은 어디에서도 살 길은 없었다. 능양군이 인목대비의 명을 받들어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올리니 그가 조선 16대 왕 인조이다. 만주족 후금 청 태종에게 치욕의 항복을 하게 될 서막이 된 인조반정의 한 장면이다.
 태초의  인류 역사 기록인 환국(기원 전 7,197년)에 이어 배달국,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우리나라 고려시대에 일어난 고조선 후손들이 세운 금나라, 원나라, 그 이후 우리 조선 시대에 일어난 후금(청)이 차례로 그 대를 이은 만주의 주인들이다. 흔히 우리는 만주족을 오랑캐라느니 되놈들이라느니 하여 경멸하기도 하지만, 만주의 주인인 이들이야말로 지금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겨레와 동족인 고조선의 후예들임을 잊고 하는 말이다..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부여, 삼국시대, 발해에 이르기 까지는 정상적인 정권교체에 따라 만주 땅이 우리와 같은 고조선 후예들의 손으로 승계되고 있었지만, 발해가 망함으로써 우리 손에서 떠난 것으로 사가들이 기술하고 있는 시기인 고려 때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겨레가 그 땅의 주인이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일임을 밝혀 둔다. 그 뿌리는 신라 문무왕이 자신의 조상에 대하여 밝힌 바와 같이, 우리 단군조선의 제후국 중 하나인 흉노의 한 왕자(김일제)가 한나라 무제 때 포로가 되어 한나라 궁에서 살게 되었고 그가 남긴 자손 중 하나가 김알지라는 것이며, 그가 바로 문무왕의 조상이라는 내용이다.

 이 김알지의 후손인 신라의 마지막 왕에게 눈물로 사직을 지킬 것을 호소한 마의태자(金 幸 또는 金 俊)가 부왕(경순왕)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천 년을 이어 온 신라가 고려에 귀속되자 김 행(麻衣太子)은 강원도 등을 거쳐 만주에 이르렀고 그가(법명은 함보) 새로운 나라를 선포하기에 이르니 자신의 성씨인 금(金)을 국호로 하는 ‘금’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이 ‘금사(金史)’의 기록이다. 금나라를 선포한 아골타가 황제라 일컬었다. 이 아골타가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 ‘형인 대 여진 금 국 황제는 아우인 고려 국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 위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아골타가 김 행인지 그이 자손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아골타의 조상은 신라의 경순왕임을 그들의 국명으로 천명한 것이다. 만주에는 퉁구스계의 여진족이 널리 퍼져 부족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여진족들의 도움을 받은 아골타는 1만도 안 되는 군사로  요(療 거란)의 10만 대군을 격파하고(1,114년) 요의 영강 주를 점령했다. 그 후 거란은 70만 대군으로 금을 공격하여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으니 곧 아골타에게 패했다.
 이 때 송(宋)나라는 몹시 거슬렸던 요나라가 금나라에 패하자 금나라와 동맹하여 요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양국의 경계를 다시 설정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송나라는 그들 간의 약정대로 연경을 송으로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금나라는 자신들이 빼앗은 땅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후 여러 차례 회담 끝에 송나라는 금나라에 은 20만 냥, 비단 20만 필을 금나라에 조공으로 바치기로 하고 연경을 넘겨주었다. 한 편으로 송은 요나라 잔여 병을 끌어들여 금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금나라는 송의 수도 개봉으로 진격했다. 송의 흠종과 휘종 두 왕이 금나라로 잡혀가는 금나라의 대승으로 끝나면서 송은 치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었다. 송나라의 기술자, 예술가 등 수 천명이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연행되어 갔다. 금나라 태종은 송나라 황제들의 직위를 박탈하여 강등시켰다. 그 여파로 송 휘종의 아우 조구(宋 高宗)가 남쪽으로 수도를 옮겨 남송을 세웠다. 이 남송을 금나라가 다시 공격하자 송은 다시 그들의 수도 임안에서 항주로 옮겨야 했다. 이 때 송나라에서는 각지에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병들이 일어나 한 때 약간의 성과를 올리기는 했지만 막강한 금나라 군에게 이기지는 못했다. 송나라의 충의 용사 중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장수가 악비다. 그는 농민 출신이지만 무예와 병법에 뛰어나 한 때 금나라 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여 맹위를 떨쳤으나 문약에 빠진 송나라 신하들이 그를 잡아 투옥하여 죽이니 그것으로 금나라에 대한 항쟁이 시들어 버렸다.
 
 금나라가 이처럼 송나라를 짓밟고 있을 때 북방의 몽골족이 일어났다. 이 몽골 또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고구려의 변방에 속한다. 몽골족의 귀족인 칭기즈 칸이 나이만 부를 공격하였다(1,204년). 이 칭기즈 칸에게 금나라의 사신이 찾아 와 새 황제 위소 왕에게 배례를 올리고 조서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당시 금나라는 동일 된 몽골족의 위력을 우려하여 몽골족을 다스리고 있었다. 참고 때를 기다리던 칭기즈 칸은 금나라 정벌에 나서 나라를 초토화 시켰다(1,215년). 패한 금나라는 강화를 맺고 개봉으로 천도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몽골의 위협 속에서도 남송을 공격하던 금나라는 몽골과 송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나라를 잃게 되었다.
칭기즈 칸은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능력주의에 기반을 둔 강한 군대를 이끌어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사에 용맹하면서도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기도 하지만, 몽골에서는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 받고 있다. 그는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금나라가 수백 년 후 다시 살아났으니 조선조 중기 만주 땅(건주 여진)에서 일어난 누르하치의 후금이다. 이들 또한 이전의 금나라와 같은 겨레인 마의태자(金 幸)의 자손이다. 그의 성씨가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말자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니 그 것 만으로도 의미가 선명해진다. 그가 명나라를 누르고 후에 국호를 후금에서 청(靑)으로 고쳐 중국 마지막 왕조를 장식했다. 이 과정에서 일어 난 전쟁 중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치욕의 전쟁,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던 굴욕적인 전쟁, 병자호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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