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힘이 센 사람이 힘 약한 사람을 잡아서 도구로 삼아 부려먹는 노예제도, 아마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되면서부터 원천적으로 있어왔던 일일 것이고, 오늘날이라고 해서 이 노예제도가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고 겉치장만 달리한 채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사람의 가치나 등급이 오로지 힘의 논리로만 결정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만 천하에 노골적으로 뚜렷하게 그 추한 겉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마도 로마시대였던 것 같다.. 기원 전 8세기 경 아리아인의 자손이 티베르 강 근처에 있는 근체에 마을을 만들어 서서히 성장하여 도시를 형성한 다음 그 세력을 전 이탈리아로 넓히고 나중에는 시실리 섬 까지 확장해 나간  로마제국은 지배층 귀족 세력과 평민 백성들 사이에는 끝없는 갈등의 씨앗을 품은 채 성장해 갔다. 로마 제국의 승리가 이어지면서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가 된 이방인들은 노예가 되어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노예의 수는 늘어나고 사치와 빈곤이 병행하였으니 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부유층에서는 흥행의 승부로 빈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하였으니 검투사 노예들이 흥겨워 하는 관객들 앞에서 서로 칼질을 하면 목숨을 주고받는 피비린내 나는 오락이 연일 이어져 간 것이다. 황제가 세습될 때에는 점점 사납고 포악해지다가 점점 군부가 세력을 잡아 황제의 폐립까지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니, 황제가 이들에게 뇌물을 써야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일반 서민이나 정복지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탈취해 왔다. 또한 노예무역이 성행하여 동방에서는 로마 군대에 의한 정규적인 노예포획이 성행하였다. 원형극장(Colosseum)에서는 하루에 1,200명이 넘는 노예 검투사들이 황제와 귀족들의 심심풀이 대상으로 목숨을 던져주어야 했다. 덩치만 커진 로마 사람들은 점점 내부 갈등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그들의 전투력을 잃어갔고 자신들도 모르게 빠져 나오지 못할 점점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신 행로 개척이 시작되자 서양은 앞 다투어 아프리카로 침입하여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들이 만들어 낸 흉악무도한 노예 잡이가 시작된 것이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 팔아먹는 혈육무역은 거의 4세기 동안 이루어졌다. 아프리카에서 잡을 포로들을 포르투갈에서는 아메리카의 카리브 해로 이동시켰고 이어 스페인, 네델란드, 프랑스, 영국, 미국이 이러한 악랄한 계획에 가담했다. 이들은 효과적으로 노예무역을 행하기 위해 노예 무역회사를 만들고 군대를 파견하는 등 엄격하게 통제했고, 그 규모가 커져만 갔다. 서양의 노예무역은 삼각무역으로 이루어졌으니, 먼저 서양에서 값싼 물건들과 무기들을 배에 싣고 아프리카에 도착한 다음 이 물건들을 흑인 노예들과 바꾸어 미국으로 싣고 갔고, 이어 이 흑인 노예들은 담배와 면화 등과 교환되는 것이 그 과정이자 결말이다. 배 한 척이 도착하면 흑인 노예들은 세 차례에 걸쳐 팔렸는데 그 이윤이 몇 배에서 몇 십 배 혹은 몇 백 배 까지 뛰었다. 영국의 리버풀(Liverpool)은 원래 한적한 작은 마을이었지만 노예무역이 성행한 이후 영국에서 제 2의 항구도시가 되었다. 성공적인 노예판매를 위해 노예 업자들은 리버풀 항구에 흑인의 머리를 걸어두고 노예를 판다는 광고를 했다. 처음에는 흑인 촌을 습격하여 노역자나 병약자들을 죽인 후 청년들을 강제로 끌어오는 방식을 취하다가, 나중에는 이 방식을 바꾸어 마을의 수장에게 값싼 물건이나 무기를 팔아 각 부락이 싸우도록 부추겼다. 그렇게 해서 싸움이 일어나면 그 혼란한 틈을 타 포로로 잡힌 흑인들을 끌고 갔다. 수갑과 족쇄를 찬 흑인들을 항구로 데리고 오면 시장에서 노예매매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매질을 견디지 못한 수많은 흑인들이 죽어나갔다. 매질을 해서 얼마나 견디는지를 가름 하거나 흑인 노예의 건강상태를 보고 가격을 매겼다. 한 번 때려서 넘어지면 싼 값에 팔렸고, 열 번 때려도 넘어지지 않으면 높은 값에 팔려 나갔다. 매매가 이루어지면서 인두로 노예의 가슴이나 팔에 노예무역회사의 낙인을 찍었다. 흑인노예들을 배에 태울 떼에도 한 번에 많은 수를 태우기 위해 선실에 많은 노예들을 몰아세웠고, 비좁은 공간에서 노예들은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어야 했으니, 공기는 탁했고, 음식도 썩거나 상해 수많은 사람들이 굶거나 여러 가지 질병으로 사망했다. 노예가 숨질 것 같은 위급한 상황에는 바다로 던져버렸다. 사망률이 높을 때에는 1/3이 죽었고 절반 이상이 바다에 버려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바다에 배가 지나갈 때면 시체를 먹으려는 상어 떼가 득실거렸다. 4백년이나 이어진 이 잔혹한 노예무역으로 유럽은 점점 부를 쌓아갔다. 이처럼 노예무역이 강대국들에게는 자본주의의 촉진을 이루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아프리카는 점점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이 잔악한 노예무역은 비극적인 세계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 노예무역이 이루어졌던 곳은 여전히 남아서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세네갈, 나나, 탄자니아 등지에 있는 노예무역 시장에서는 사방이 견고하게 지어진 노예무역회사가 남아있다. 지하에는 흑인노예를 잡아 가두는 감옥이 있는데 그 곳은 더럽고 좁으며 음침하고 퀴퀴한 냄새는 아직도 코를 찌른다. 지상에는 노예들을 고문하던 형기구와 수갑 같은 물건들이 흩어져 있고, 담벼락은 흑인 노예들의 혈흔이 역력하다. 탄자니아에 있는 노예무역 회사는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는데 노예를 묶었던 곳이 아직도 남아있고 배로 운송되는 노예를 이동시켰던 비밀통로도 그대로이다. 세네갈의 고래 섬은 노예시장 중 가장 큰 곳이었다. 이는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시절 영국, 네델란드,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가장 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세계인류문화재 유산으로 등록했다.
 아프리카의 흑인노예들에게 운명을 논한다거나 그들의 무능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우리 인류 전체의 뱃속에 가득 차 있는 검은 속셈을 따로 제켜둔 비양심적인 모습을 감출 수 없다. 이런 암담한 인간의 모습일수록 거기서 밝은 모습, 희망적인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말해준다. 그 희망이란 가끔 우리를 속이고 배신한다. 이루어지리라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깨지는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희망으로 전진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살 길이 절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어두운 역사 또한 지워 낼 수 없는 역사다. 노예제도가 역사의 유물로 사라진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노예타령을 할 일은 없어졌지만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한 존재라야 한다는 우월감, 그 검은 속셈이 수그러들어 사라지지 않는 한 노예제도란 늘 잠깐 숨어서 그 출구를 찾고 있는 중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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