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에게 해 에머랄드 빛 바다는 그리스와 터키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리스와 터키의 고대사를 알고 여행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해 일천한 상식을 설파한다. 그 지역의 역사를 알고는 여행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나는 이들 국가를 2~3번에 걸쳐 두 달간의 방문 전후로 관련된 영화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몇 번이나 보고 읽었음은 물론, 이곳 고대사에 심취한 바 있다. 제법 장기간 탐험에서의 우여곡절을 겪었기에 나름 쉽게 풀어보나, 아직도 어렵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역사상 영웅들과 신들의 각축장인 에게 해 바다 속에는 숱한 사체 더미가 있을 게 빤하며, 토로이 같은 경우는 9번의 역사적 세력이 바뀌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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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마케도니아(Macedonia)는 필립2세 왕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이자 조국이다. 부자의 탄생지 수도가 ‘펠라’였던 마케도니아는 현재의 마케도니아공화국(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 독립한 국가)과는 다르다. 알렉산더는 필립2세와 어머니 올림푸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뱀과 동침하는 올림푸스가 낳은 알렉산더가 제우스의 아이인지, 아니면 필립2세 자신의 아이인지에 대해 코린토만이 내려다보이는 델포이 신전에 신탁을 가기도 했다. BC 356년, 이곳에서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 이하 알렉산더)가 탄생해 22년을 보냈다. BC 336년, 46세의 필립2세는 그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호위병에 의해 살해되자 20세에 알렉산더가 왕위를 계승한다. 1977년 무덤이 발견된 속에는 금으로 된 상자 안에 유해가 모셔져 있었으며, 그의 헬멧과 방패까지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지역의 폴리스들을 평정한 후 코린트 동맹(Corinth League)의 맹주가 되었다. 필립2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겨울, 알렉산더는 직접 델포이를 방문하게 된다.

선왕인 필립2세는 에게 해 맞은편 페르시아를 공략하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다. 필립2세는 쉰이 다 된 나이에 이를 위해서도 클레오파트라(서양 최고의 미인으로 회자되는 클레오파트라와 동명이인)와 혼인하는 일종의 결혼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가 1년 후 아들을 낳자 필립2세와 알렉산더의 동맹관계는 끝난다. 무론 선왕(필립2세도 그리스의 맹주였다)이 이룬 토대 위에서 출발한 알렉산더는 현재의 터키에서 파키스탄까지에 걸쳐 있던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약100년 간 침략당한 그리스의 도시들을 되찾으려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BC 334년, 5만여 병력으로 그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와 함께 헬레스폰토스(Hellespont, 다르다넬스, Dardanelles)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 원정에 나서 20일 만에 트로이(Troy)에 당도했다. 그곳 그라니쿠스(Cranicus) 강 전투에서 승리하여 빼앗겼던 그리스의 도시들을 되찾게 된다. 또한 1년 후에는 소아시아 동남쪽의 이소스(Issus)에서 페르시아 군과의 전투에서 승리 후 바빌론을 거쳐 마침내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Pcrsepolis)에 도달하였다.

 
패배한 페르시아군이 내륙으로 쫒기는 동안, 알렉산더 원정군은 타루스 섬까지 방파제를 쌓아 에게 해를 제패 후 계속 진군하여 페르시아에 점령당해 있던 이집트도 해방시키고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그 후 알렉산더는 점령지마다 70여 곳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오늘날 인구 약 500만 명에 달하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그때 건설한 것이다.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 유클리드(Euclid) 등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도시이기도 하다.

알렉산더는 29세에 결혼하고 365명의 후궁을 두었다. 그의 누이 데살로니케는 카산드로스와 결혼한다. 데살로니케는 현재 그리스 제2의 도시로 그의 누이 이름을 딴 지명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더스 강 원정에서 화살을 맞은 그는 기원전 324년, 바빌론으로 회군하기에 이른다. 열병을 앓아 쇠약해져 다음해, 33세를 열흘 남겨두고 사망한다. 그의 주검은 그리스로 가려다가 이집트 왕이 가로채는 바람에 알렉산드리아에 묻혔으나, 그 흔적은 아직 찾을 수가 없다. 3만 2천km의 대륙을 누빈 그는 동서양 문화를 융합했으며,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장군으로 자리매김한다. 죽었어도 그의 존재는 영원하다.

2004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알렉산더>가 상영된 바 있다. 애꾸눈이었던 필립2세는 ‘유리다케’란 두 번째 부인을 두면서 디오니소스나 제우스의 아들로 자처하기도 했으며,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왕도 그의 존재를 두려워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는 그 시점으로부터 4세기 전 트로이 신화에 푹 빠진 채 아킬레우스를 흠모하면서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전쟁터에서도 읽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토로이 전쟁터였던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페르시아제국 다리우스 왕과 혈전을 벌이게 된다. 다리우스3세(알렉산더에게 쫒기다가 다리우스 그의 부하 베수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생포에는 실패)를 죽인 그는 25세에 이 세상의 왕이 되기에 이른다. 다리우스3세의 시신 앞에 예를 취한 그는 “부귀는 부패를 부른다.”, “(다리우스의)신하가 되면 외로워진다.”를 외쳤을 것이다. 그리스가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850~900년 만에 다시금 그 부근에서 쟁취하는 그리스의 승리였다. 그 영광 앞에서 다리우스3세의 장녀는 “자신을 노예로 삼되,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겠다.

페르시아 북부 고산족 ‘록산느’에게 반한 알렉산더에게 그의 어머니는 “육체의 쾌락을 멈추라.”, “7년간의 전쟁에 민심이 흉흉하다.”고 훈수를 두었겠다. 그녀는 필립2세의 아들이 아닌 ‘신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부인한 알렉산더는 어린 시절, 그의 죽마고우인 ‘필로타스’에게 싸워 한 번 패한 적 밖에 없다고 한다. 무론 그도 알렉산더를 따라 동방원정이란 대장정에 동참했겠다. 영화에서 필립2세는 자신이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아들이라고 했다가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하는 등 헷갈리게 한다. 사후 그가 이룬 제국은 네 개로 나누어져 40년간 왕권다툼으로 이어졌다. 카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가 시리아, 프톨레마이스가 이집트, 그리스 본토는 두 도시동맹이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제국 건설 후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인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 하지만 끝내 로마에게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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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문학평론가. 시사평론가(객원논설위원). 한국법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저서> 정치평론집 밎 비평에세이 등

*본고는 정종암 평론가(위 사진)의 지중해 여행기와 그곳 고대사 연구에 관해 저술중인 원고 중 하나로 저작권이 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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