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고성읍 수남 리 에는 오랜 옛날부터 '대섬'이라고 불리어진 섬이 있다. 지금은 벌써 오래 전에 간척 또는 매립되었고 바다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대섬이라는 그 이름마저 기억하는 사람조차도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해안에는 발길 닿는 곳 마다 대섬이라는 섬이 널려 있어 이들 섬에 옛날에 누가  모두 대(竹)를 심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대섬(竹島)들은 실은 대가 아닌 돌(石)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하여 그 발음만 대(竹)로 변한 모습임은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다. 풀 한 포기조차 눈여겨 살펴보지 않는다면 찾아보기 어려운 섬마저도 이름은 '대섬'이지만 실은 모두가 돌(石)로 된 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 돌(石)은 도꾸(또는 도끼斤), 도치, 독과 같은 지금의 사투리가 보여주듯 생활 도구인 도끼의 재질이 돌(石)이라는 데서 붙여진 '도끼' 와도 동근어(同根語)이니 원래의 이름인 '돌섬(石島)'에서 대섬으로 변한 이름이라는 데는 아무런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이 돌섬이 대나무 한 그루 없는 대섬이 되어 곳곳에 널려있는 것이 돌섬들 중 동해안에 외딴 곳이 홀로 떠 있는 '독도(돌섬 獨島)'가 된 것인데, 이 섬에 엉뚱하게 대(竹)라는 이름을 도둑질하여 갖다 붙여 죽도( 다께시마 竹島)라는 이름의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일본인들의 작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지 벌써 오래다. 멀리 신라의 이사부 장군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서를 찾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가 쓰는 언어 속에 기리어져 있는 덮개를 벗기기만 해도 우리 땅임을 말해주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할 일이니, 침략자 또는 도둑근성의 망령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되는 행패일 뿐이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던 시기는 제국주의가 세계적으로 팽창하던 때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진보'라는 미명 아래, 문명이 발전한 나라가 그렇지 못한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던 시대였다. 일본도 이 영향을 받아 아시아를 식민 지배하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시기다. 일제가 한국사를 왜곡한 데는 이러한 식민사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식민사관이 더 나아가 일본의 고사기, 일본 서기 등에 뿌리를 둔 황국사관(皇國史觀)으로 이어지면서, 고대 한국의 왕을 일본인의 후손으로 왜곡하고 고대 한국이 일본에게 정복 또는 지배를 당했다는 말도 안 되는 거꾸로 된 거짓을 역사랍시고 비틀어 놓은 것이다. 우리 한민족이 미개한 왜인들에게 문명을 전수하여 깨우친 것이 깡그리 사라졌을 뿐 아니라, 백제가 망한 뒤에 '일본'이란 국명이 생겨났는데도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일본'이란 국명이 있었던 것처럼 조작할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의 기록을 일본 왕 중심의 마음대로 조작해 적어둔 가짜 역사를 역사라고 우기고 있다. 식민지사관은 한국사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조선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역사관이다. 여기다 한국사는 자율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항상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 아래 역사가 전개되어 간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한반도 역사는 외세의 부단한 침략과 영향에 의해 타율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자주적 역사를 형성할 수 없었고 역사적으로 자율적 독립 의지가 없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음으로서 비로소 타율성을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조금 더 구체화하면, 단군성조가 고조선을 건국한 것을 부정하고 한국사는 첫 장부터 식민지로 출발했음을 강조한다. 한반도의 상고시대 문화를 묵살하고 고대국가로서의 출발을 늦추어 잡는 등 한국 고대사의 상한선 까지 끌어 내렸다.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일본에 미친 한국의 영향을 일체 묵살하였다. 또 삼국시대를 그 출발로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이어진 우리 역사를 단순한 왕조 교체로 규정하여 사회발전이 결여된 정체의 역사로 설정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 사대주의 뿌리 하에 독자적이고 창의성이 깃든 이룩할 수 없었고 모방성과 외래성이 한국 문화의 특성을 이룬다고 강조하면서, 외세의 침략에 허덕이는 어둡고 수치스러운 부정적 성격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국을 강탈한 일제의 고민은 총칼로 일시 지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식민지로 만드는데 있었고, 그렇게 하기에는 조선의 문화적 저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조선인들에게 일본 혼을 심어준다'는 목적 아래 조선사 말살을 위한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조선의 관습과 제도를 연구한다는 미명하에 헌병과 헌병 보조원을 앞세워 1910년부터 조선 강토 구석구석을 뒤져 역사서를 포함한 20여만 권의 각종 도서를 수거하여 대부분 불살라 버렸다. 그러는 가운데도 조선사를 왜곡하는데 무리가 없거나 식민지화에 도움이 될 만 한 사서는 그대로 남겨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19년 3.1 운동 후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면서 조선 총독부 중추원 산하에 있던 역사편찬 업무를 조선총독부 직속 조선사편찬위원회로 이관하고 식민통치 합리화를 위한 역사서 편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편찬한 조선사에는 식민지 통치에 유리한 자료는 넣어두고 불리한 것은 빼어 버렸다. 일제가 이 조선사 편수에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부분은 단군 관련 자료 삭제와 한국과 일본이 동조동근(同祖同根)임을 강조하는 한 편, 조선인은 열등하고 일본인은 우수하다는 인식을 심어 준다는 점이다. 이 조선사 간행은 민족 정체성을 뿌리 뽑아 한민족을 일본 왕의 신민으로 전락시키려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이 그 핵심인 것이다.
 이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의 뿌리를 제거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선 사람이 일인 이마니시류(今西龍)이다. 그는 삼국유사 고조선 기에 적혀있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의 네 글자 중 하나인 국(國)을 인(仁)으로 바꾸어 석유환인(昔有桓仁)으로 조작해 놓았다. 그가 조작한 대로라면‘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 가 아닌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로 되면서 환국 3301년과 7세 천황이 들어갈 자리에 환인이라는 한 사람의 인물만 있었던 것으로 되고 이어 환웅이라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이 있고 이어 단군이라는 인물이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된다. 환국( 7세 3,301년), 배달국(18세 1,565년), 단군조선(47세 2,096년)에 이르는 7천년의 역사가 마치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에게 넘어 가는 100년 정도의, 그것마저 옛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신화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의 건국 연대와(기원 전 57년 건국한 신라) 실록 등의 자료를 믿을 것이 못된다하여 고구려는 6대 태조왕, 백제는 8세 고이왕, 신라는 17대 내물왕 때에 건국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국통이 고조선(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에서 부여시대, 삼국시대, 남북조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이 과정에서 고조선 시대를 신화의 시대로 날려버리고 7천년 고조선의 시작을 도적떼 위만정권으로 잡아놓고, 그것도 모자라 지금 중국의 갈석산 서쪽 근처에 위치하던 위만 정권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과 대동강 유역으로 잡아놓고 그 이남은 일본이 다스렸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거짓을 제멋대로 조작해 놓고 이를 조선인들에게 가르쳐 왔다.
 우리의 역사 문제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일본이 물러간 지 70년이 넘은 지금 바로 이 날조된 식민지 사를 우리 역사라고 후세대들에게 그대로 가르치고 있으니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직도, 침략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일본도 문제지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들의 침략 정당화 장단에 춤추고 우리의 역사 교육은 근원적으로 밥만 축내는 썩어 문드러진 집단임을 절규하고 성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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