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백제는 지금의 호남과 충청 지역에 국한 된 소국가라는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이며, 백제의 경제적 능력은 고구려를 능가하고 있었으니, 그 영토가 지금의 중국 동부지방, 지금 우리나라의 충청, 호남지역, 그리고 지금의 일본에 걸친 넓고도 강력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백제가 일찍이 지금 중국 땅인 요서지역을 포함한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 진출해 통치한 사실은 중국의 주요 사서인 송서(宋書), 남제서(南濟書), 양서(梁書), 남사(南史), 북제서(北濟書),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등에 기록되어 있다. 백제 고이왕 13년(246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정벌한 일이 있었고 이 때 백제왕은 낙랑이 비어있는 틈을 타 좌장 진충(眞忠)을 파견하여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였다. 그 후 분서왕 7년(304년)에도 낙랑의 서부 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이때의 낙랑이란 지금 대동강 유역의 지역이 아니라 지금 중국의 갈석산 서부 지역이다. 요서, 진평을 점령한 백제는 이어 해안선을 따라 구석구석 식민지를 만들고 제해권을 장악하여 동성왕 때(479-501년) 때에 이르러 북경 지역과 산동 성 상해와 양자강이남 지역까지의 중국 동부 지역과 황해 바다 전체를 평정한 대 제국이 되340년이 넘게 다스렸다.. 경제 대국이 된 백제는 다시 동으로 일본을 위성국으로 삼아 다스렸다. 일본의 나라 현 텐리(天理)시 이소가미 신궁에는 백제 진지왕이 왜국의 신공(神功)왕후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봉안되어 있는데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비틀어서 백제왕이 신공 왕후에게 칠지도를 바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백제의 좌현왕 여곤(餘昆)은 본국 백제의 동쪽인 일본을 다스렸고, 우현왕 여기(餘紀)는 지금의 중국 땅을 다스렸다.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에는 백제라는 지명이 무수히 남아 있다. 백제는 제후국인 왜를 고구려와 신라와의 전쟁에 여러 차례 동원하였다.
 
 해상 왕국으로 발전한 백제는 섬라(태국), 부남국(캄보디아), 인도와 교역했고 북큐슈, 오끼나와, 대만,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교역로를 확보했다. 백제의 남방 경영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탐라(제주)가 주요 거점 이었다. 그 교역로가 필리핀과 아랍 지역 까지 넓힌 배경에는 백제 인들의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때(660년)백제는 문을 닫았다. 그러자 백제 무왕의 조카 복신과 승려 도침이 주류성을 거점으로 백제 복위 운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왜국에서 돌아 온 부여 풍(扶餘豊)을 맞아 왕으로 맞아 백제 부흥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3년 후인 663년 부흥 군을 이끌던 부여 풍과 복신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복신이 병을 구실로 굴속에 누워서 부여 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죽이려고 했다. 부여 풍이 이를 알고 미리 복신을 급습하여 죽였다. 부여 풍이 그의 부하 장수를 죽인 것을 안 신라가 곧 바로 주류성을 빼앗으려 했고 이에 왜국은 27,000명의 대군을 보내 신라를 치게 했다. 이 왜군은 나 . 당 연합군을 만나 보름 만에 대패하여 전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패한 백제 부흥 군의 왕 부여 풍은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신라군이 왜군을 맞아 네 번을 이기고 왜선 400 여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다를 붉은 빛으로 물들인 것이다. 백강구 전투에서 구심점을 잃은 부흥 군이 힘없이 무너져 간 것이다. 백강구에서 패한 부흥 군은 그들의 거점인 주류성을 열흘 만에 연합군에 내 주어야 했다.

 그러면 여기서 당시 이미 망하고 없어진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대규모 함선과 대군을 보내어 백제의 부흥 운동을 지원한 이유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백제의 왕위 계승 후보인 왕자가 일본에 가 있다가 나라의 위기에 지원병을 데리고 귀국한 부여 풍의 귀국 사례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보다 훨씬 앞서 백제의 아신왕(阿莘王) 때에 전지태자(397년)가 일본에 간 일이 있고,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昆支), 무령왕의 아들 사아군(斯我君), 성왕의 둘째 왕자 혜(惠), 위덕왕의 아들 아좌(阿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631년)이다. 백제는 국가적인 위기 때 마다 왕자들을 왜국에 보낸 것이다. 당시 왜국은 다이카(大和) 정군이 출현하면서 5-6 세기에 걸쳐 고대 국가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었고 우수한 문화와 문물이 절실한 때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백제는 왜국에 선진 문물을 제공하고 왜국은 군사적 지원을 백제에 제공한 것이다. 부여 풍이 이미 망하고 없는 백제로 귀국할 때 군사 5천으로 귀국 길을 호위하게 했다. 왜군이 대대적인 지원군을 보낸 것은 백제 외교술의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다이카 정권이란 신라 계 정권이고 후에 백제계 정권으로 넘어간 다음 백제와 왜국과의 교류가 더욱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백제의 몰락은 일본 열도에 군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왜는 백제 기술자들을 동원해 나. 당 연합군의 침략이 예상되는 쓰시마에서 북 큐슈, 세토 내해와 왕도에 이르는 요충에 10여 개의 성을 쌓았다. 또 왕궁을 내륙으로 옮기기도 하였으니 왜가 얼마나 겁먹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또 왜는 신라가 왜국에게 구 백제의 연고권을 주장할 것이 두려워 이전에 백제 계열의 천황이 다스리던 나라가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우고자 새로운 국호인 일본(日本)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백제 멸망 이후 다음은 왜국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왜의 대외 정책이 폐쇄적이면서 자위적인 방향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로 인해 왜는 한 동안 국제사회에 나오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데 열중했다. 백강구 전투에서 패한 후 새로운 수도가 된 시가 현 오오츠시(大津市)에는 천황을 모신 오미신궁(近江神宮)이 있다. 오미신궁 앞에 있는 일본 최초의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든 사람은 백제 인들이다. 백제 유민들은 병법, 의학 등 분야별로 역할을 맡았다. 지금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권학당(勸學堂)을 지은 이들은 왜인들을 가르쳤다. 또 애국은 율령 체제를 확립하고 국가적인 기틀을 다졌다. 백제 멸망 이후에 왜국에 선진 문화가 꽃피게 된 데에는 모두 백제 인들의 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고대 백제 문화를 보려면 일본 문화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 여기에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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