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다른 사람들이 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저는 안 낳을 겁니다. 안 낳는 이유 딴 거 없습니다. 가난 대물림, 고통 대물림, 하기 싫어요. 나 하나 좋으라고 대책 없이 아이 낳아서 남들 하는 것도 못시키고 고생시키고 살 바에는  로또 같은 희망 하나 믿고 아이 낳는 일은 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겠네요.

남 덕 현
전 초등학교장
 우리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루 밥 세끼만 겨우 먹어도 그걸 만족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건 현재의 상황일 뿐이며 장래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가난이야말로 가장 나쁜 종류의 폭력이다. 가난은 절대로 놀림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말하고 있다. 우리속담에도 ‘가난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가난은 비참하며 사람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난해서 비굴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며 그것은 죽음보다도 무섭다. 가난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욱 가난해지며 부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큰 부자가 된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새로운 얘기가 아니지만, 한 번 빈곤층으로 전락하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구조가 심화하고 있다는데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엄청난 반전이 없는 한 부(富)와 가난, 모두가 고스란히 대물림 되는 게 요즘 사회다.
 서글픈 일이다. 부모가 가난하면 흔히 그 자식들도 가난하며 이렇게 가난이 다음 세대로 이어져나가는 것을 가난의 대물림이라고 한다. 우리사회는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심한 나라이다. 왜냐하면 사회의 부가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어서 그 부를 한번 거머쥐면 그것을 기초로 하여 부를 더욱 확대 축적하는 것이 쉽고 그 반대는 가난에서 헤어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자가  부동산투기로 큰돈을 벌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그 부동산을 담보로 하여 은행에서 큰돈을 대출받아 부동산에 재투자하는 식으로 다시 큰돈을 벌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번 돈은 그 사람 자녀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 자녀들의 호주머니는 늘 윤택하다. 그런 반면에 사회의 경제적 기회에서 거리가 멀거나 그런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돈을 벌기가 어렵다. 부모가 돈이 없기 때문에 자녀들은 좋은 교육을 받기 어렵고 다시 그 자녀는 사회적 기회에서 소외되어서 가난은 이렇게 대를 이어간다. 이런 가난의 대물림이 큰 사회문제인 것이다.

 최근 빈곤문제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가 가난의 대물림이다. 한국은 노동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가 많은 역동적 나라로 평가받았고 사회발전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IMF환란과 경기침체를 겪으며 열심히 일하지만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동빈곤 계층의 등장과 이들의 가난 대물림 현상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가난의 대물림은 계급의 고착화 현상이 우리 사회에도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빈곤세습의 메커니즘은 무엇이고 빈곤계급의 고착화가 빚어낼 악영향은 무엇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난이 대물림 되는 경우가 많다. 가난으로 인해, 많은 빚으로 인해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났기에 마음속에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보다는 부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어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그 결과  제대로 취직하지 못하고 제대로 결혼하지 못하여  가난이 대물림 되는 경우도 많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시절은 이미 저 먼 곳의 깊은 곳에 잠재워졌으며, 21세기 들어오면서 양극화와 고령화가 사회적 해결과제로 급부상했다. 양극화가 무서운 것은 당신의 귀여운 자녀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당신의 결제 수준에 의해 학벌과 계급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사실 큰 이슈나 충격은 아니지만 이를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 어렵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현대사회의 양극화는 특정 계층의 의도적인 조작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편리주의, 개인주의, 단절, 우월주의, 편익 위주의 삶 추구, 고립공간에서의 자신만의 삶 영위 등 사회문제보다는 개인의 이런 모습들이 사회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는 자본밖에 믿을 것이 없고 노동은 이제 자본시장에서 큰 가치를 발견할 수 없으며 더 이상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오히려 부자들보다도 더 열심히 노동을 팔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사실이다.

 이미 세상은 노동의 힘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노동으로 벌어들인 자본을 어떻게 투자하고 어디에 투자하고 언제 투자하고 얼마나 투자할지 특히 자본 외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깊이 생각할 시대임은 분명해 보인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로 가난의 대물림은 우리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 하지만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자식에게 물려 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가난은 대물림되고 있다.
 2011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조사에 의하면 전체의 58.8%가 노력에도 불구 계층상승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응답했고, 자식들에 대한 희망도 크게 줄어 43.0%가 계층상승의 가능성이 없다고 밝혔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어떤 수준인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터무니없이 부풀었던 꿈이 부른 비극과, 꿈조차 없이 사는 99%의 절망,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일까? 요즘 경기가 어렵다고 먹고 살기 힘들다 하지만  그건 힘없는 서민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부자들은 해외에 나가서 펑펑 돈을 쓰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자의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는데 어찌 가난을 탈피 할 수 있겠는가!  부모가 가난하면 자녀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가난의 대물림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평생 살아가면서 부모를 원망하면서 살아 가야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버지에게서 물려진 가난이 나에게 물려졌고, 이제 자식에게도 물려질 것이다.’ 얼마나 현실과 미래가 비참하고 통탄할 일인가!
 가난한 사람들은 왜 생겨났을까? 게을러서? 운명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못 배우고 못나서? 팔자가 기구하게 태어나서? 그래서 가난을 숙명으로 생각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최소한 농경사회에는 그런 논리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아니 오늘날에는 매일같이 놀면서도 여유 있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으라고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다.

 부모를 잘못만나서일까? 뼈 빠지게 일해 자식들 공부시키고 나면 가난과 병든 몸을 안고 고통의 세월을 보내다 죽어가야 하는 사람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혹은 부모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가난을 대물림 받아야 하는 사람들, 가난의 원인은 사업 실패, 대물림, 실업, 사기, 전쟁 등의 사회적 환경과 시대적 상황 등 가지각색이며 부자도 언제 가진 재산을 송두리째 잃고 가난한 사람이 될지 모른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당신 주변의 사람도 가난한 상황에 처해 있을 수도 있으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언제 가난해질지 모른다. 노인, 여성, 아동, 장애인과 같은 능률이 떨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의 경우 삶 자체를 위협할 만큼 심각한 문제이다.
 사람 역시 생물인지라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 앞에는 사랑이든 이성이든 통하지 않는다. 인류 문명이 찬란한 발전을 이룬 21세기 지금 70억이 먹고도 남을, 풍부한 물자가 생산되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것을 보면 가난의 원인이 과학 기술의 미비가 아닌 정치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정경 체제에 근본적인 개혁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인류가 망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선진국의 경우 ‘절대적 빈곤은 어떻게 해결한다.’ 쳐도 상대적 빈곤의 해결은 말 그대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를 양극화라고 한다. 가난의 대물림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사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가난이라는 삶의 불편함을 우리 서민들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아까운 청춘만 낭비하고 대기업의 부속품이 되어버리는 답답한 현실, 가난이라는 몹쓸 병에 익숙해 져버려서 성공은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기도 하다.
 양극화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적 빈곤은 갈수록 심화되는데다 대물림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다 같이 가난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내가 가난하고 타인은 잘 살며, 그것도 사회적 환경 때문에 그렇다면 참지 못한다. 이윤 추구를 제1목적으로 삼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경향이 더더욱 심화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며, 국가의 주체인 국민이 절실한 문제 해결을 느끼고 장기적인 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가망은 없다.

 우리는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안다. 정말 그럴까? 농경 사회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삼성계열사인 삼성정밀화학은 월 급여평균이 800여 만 원이다. 그러나 비정규직은 월 급여가 100여 만 원이다. 삼성계열사의 임직원은 월 60억 원의 급여를 받는다. 삼성과 현대자동차의 3세인 이재용과 정의선이 나란히 1조원 대 자산가로 올라섰다는 기사를 볼 때면 가끔 심리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정당한 대가 없이 재산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1천억 원이 넘는 젊은 부호 40명 중 스스로 기업을 창업해 성공한 자수성가형은 3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37명은 자연스럽게 부를 대물림 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90%의 서민은 가난을 대물림하며 또 다시 악순환을 반복하며 삶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악착같이 노력한다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번 뉴스에서 ‘세 모녀 자살사건’을 보았다.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라는 유서도 아닌 현금 70만원이 든 봉투만을 남긴 채 서울 송파구에서 세 모녀가 자살을 택한 비극적인 뉴스였었다. 이들의 자살이 과연 이들만의 문제인가? 선거 때가 되면 모든 정치인들은 서민을 위하고, 취약계층을 위한다며 온갖 공약을 내걸며 한 표를 부탁한다. 하지만 정작 서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전보다 더 힘든 삶의 무게 아니었을까?
 이번 박근혜 정부 또한 서민,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실천의지가 있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 전보다 더 후퇴되는 느낌도 든다. 우리나라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사회양극화의 해결과 소득 재분배가 필수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떤가? 경제발전이라는 대명제 아래 얼마나 많은 사회 약자계층이 희생되고 있는가! 운명 을 달리하신 세 모녀 자살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저소득층 지원방안이 마련되어 있고 20~30만원의 지원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미친 듯이 오르고 있는 물가에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란다.

 몇 십 만원의 방세가 없어서, 병원 갈 돈이 없어서,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국민들이 없게끔 나라가 최소한의 지원만 해준다면 더 나아지지 않을까? 근대국가라면,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면, 대통령 스스로가 복지국가를 표명하고 있는 나라라면 최소한 먹고 살려고 열심히 일하는데 좌절감, 절망감은 들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요즘 젊은 부부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애 안 낳는 이유 딴 거 없습니다. 가난 대물림, 고통 대물림하기 싫어요. 나 어릴 때 핸드폰, 스마트폰, 컴퓨터, 어학연수, 국제 중, 자사고, 몇 억짜리 아파트 이런 거 없을 때도 힘들었는데 요즘같이 임대아파트 사는 애들 분양 아파트 앞 지나가지 말라고 철망치고 사는 세상에서 아이를 낳으라고요? 생떼 같은 고등학생 300명이 바닷물에 수장 되고 초등학교도 못 들어간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부모형제를 잃어도 사망확정 안되었다고 보상금 한 푼 안주는 나라에서 아이를 낳으라고요? 만일 세상 모든 다른 사람들이  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저는 안 낳을 겁니다.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손가락 질 받는 한이 있어도 대책 없이 아이 낳아서 남들 하는 것도 못시키고 고생시키고 살 바에는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차라리 애 안 낳아서 나 혼자만 욕먹는 것이 났지, 나 하나 좋으라고 대책 없이 로또 같은 희망 하나 믿고 아이 낳는 일은 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겠네요. “
 어린 학생의 이야기를 예로 한 번 들어보자. 저희가 좀 못사는 거 같아요. 부모님이 일하시고 버시는 돈 합치면 월200 만 원 정도? 집도 좋지도 않고 차도 창피하고요. 진짜 가난이 대물림 된다는 것이 맞는 거 같아요. 다른 애들은 과외. 학원 다하고 외식도 어려움 없이 하고 가족여행도 많이 가고 그런 것이 너무 부럽고 저는 그런 걸 잘 못하니까 의욕도 상실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현실이 너무 슬퍼요.
 지난 날 '안산 저수지 가족동반자살 사건' 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빠가 ‘사랑한다.’ 하고는 갑자기 저수지로 갔어요.

 그들이 목숨을 끊은 원인은 빈곤한 삶에 대한 비관이었다. 올해만 13건의 가족동반자살 사건이 일어났고 그 중 근래 한 달 동안 7건이 발생했다. 청소년 자살 원인 1위 역시 가정의 빈곤에 대한 비관이었다. 죽음보다 두려운 빈곤의 문제! 그들은 왜 가족 동반자살을 택했는가? 그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경고하는가? 대한민국엔 미래가 없다. 다만 1%의 기득권과 자신이 기득권이 되고 싶은 99%의 서민 노예가 있을 뿐이다. 어제는 이웃집 아저씨가 죽고 오늘은 옆집 아줌마가 죽고 내일은 이제 내가 죽을 차례인가? 필자의 의견이 너무 사회의 부정적인 면만 들추었다고 비난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빈부의 격차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양극화되고 있다는 경고이며 우리 모두가 해결하여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이런 가난의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당신과 당신자녀의 일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능력이 안 되는 가정에서는 자녀가 짐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 남 덕 현은 1949년 고성읍 동외리 정동(솟골)에서 출생하여 고성 초. 중학교 및 통영고와 진주교육대학교를 거쳐 초등학교장으로 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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