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 조상들이 세운 세계 역사상 첫 국가 형태인 환국에 이어, 배달국,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겨레에게는 이(夷) 또는 예맥(濊貊)이라는 별칭 외에도 가락(伽倻), 구리 또는 구려(겨레, 갈래 종족, 나라, 성스러움의 뜻)라는 별칭도 있어 이것이 후에 고구려, 고려로 이어졌음은 반복해사 밝힌바 있다. 우리의 이족(夷族)중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백이(伯夷)다. 이 백이족은 몸에 문신을 새기고 옛날 발해 지역에 살다가 동쪽의 섬으로 흘러 들어가 살았다. 왜인의 본류는 위(魏)나나의 후예들이고 후에 진한과 마한 사람들 일부가 합류한 집단으로 나중에는 백제인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나중에 섬으로 이주한 왜인들은 가죽신을 신고 벼를 심고 모시로 길쌈을 했으며 뽕나무를 길러 누에를 쳤다. 그리고 생강, 귤, 후추, 들깨 등을 생산했다. 이 밖에도 그들은 청옥, 흑진주, 꿩 등을 생산하거나 사냥했다. 단군조선에서 맨 처음 일본 규슈(九州)지역으로 흘러 들어간 사람은 협야노(陜耶奴)다. 기원 전 2174년 가륵단군(嘉勒檀君 3세 단군)때에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단군은 대장군 여수기(余守己)에게 토벌을 명했다. 여수기는 며칠 동안 소시모리를 추격한 끝에 예 땅의 변방에서 반란군과 일대 격전을 벌여 소시모리를 격파했다. 이 때 소시모리의 참모 협야노는 격전의 틈을 타 부하 서너 명을 데리고 도망을 쳤다.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서봐야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협야노 일행은 여수기의 추격을 피해 육로를 버리고 바다를 택했다. 조각배에 몸을 싣고 성난 파도에 맞선 것이다. 한 달 동안 항해한 후 낮선 섬에 닿았으니 이곳이 삼도(三島: 九州)이다. 그 곳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벌거벗은 몸으로 몸에 뱀, 들쥐 등의 문신을 새기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고 있었다. 키는 작고 허약해 보이는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흔히 ‘왜놈’ 하면 키 작고 볼품없는 사람을 연상하는 것이 여기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왜인(일본인)들은 우리와 같은 조선인들의 후손이니 키가 작거나 못난 사람들은 아니다. 협야노 일행은 그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대륙에서 익힌 무예 실력을 한껏 발휘하면서 그들을 위압하자 그들은 협야노의 말을 잘 따랐다. 씨 뿌리고 가꾸는 법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풀잎으로 옷을 만들어 앞을 가리도록 했다. 원주민들에게 대륙의 생활습관을 알려주자 그들은 순순히 협야노를 따르고 존경했다. 협야노는 삼도에 처음으로 소도(蘇塗)를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스스로 삼도의 천황위에 올랐다. 원주민들은 협야노를 천황으로 받들고 복종을 맹세했다. 이렇게 하여 협야노는 조선족이 왜를 정복한 첫 번째 인물이 된 것이다. 삼도의 인구가 점차 늘어났다. 이웃나라나 섬에서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삼도로 흘러들어 정착하는 인구가 점점 늘고 있었으니 이들을 하이도인(蝦夷島人)이라 불렀다.

 구 후 기원 전 723년 삼도에 단군조선의 특사가 파견되었다. 원주민과 하이도인 사이에 반목이 생겨 원주민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소도를 모시고 삼신에 제사 지내는 하이도인들에게 원주민들은 처음에는 고분고분했다. 그러다가 하이도인들이 원주민들을 심하게 다루게 되자 반기를 들게 된 것이다. 원주민들이 소도를 부수고 소도를 위협했다. 협야노가 삼도의 주인이 된 후 처음으로 위협을 받은 것이다. 삼도의 구마소에서는 조선에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특사를 보낸 것이다. 이에 사벌 단군은 오가의 대표들을 모아 파병에 대해 논의했다. ‘삼도는 협야노 장군이 터를 닦은 후 우리의 예법을 숭상하는 조선의 거수(제후)국입니다. 원주민들의 행패에서 우리 배달나라 후예들을 구해야 합니다’ 오가의 의견들이 일치했다. 사벌 단군은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에게 명하여 선단을 만들어 군선을 띄웠다. 파병 군선은 파도도 없는 바다를 무사히 건너 삼도에 도착했다. 언파불합 장군은 삼도의 해변에 군막을 치고 작전 회의를 열었다. ‘원주민들이 한꺼번에 쳐들어오면 오히려 사움은 쉽게 끝날 수 있습니다. 만일 놈들이 전면전을 피해 기습전을 펴면 이곳 지리에 어두운 우리가 불리합니다.’ 언파불합 장군의 작전참모가 말했다. ‘그렇다면 기습작전에 대비하도록 합시다. 해변의 숲을 감시하고 바다를 이용하여 쳐들어올지 모르니 방심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언파불합 장군은 난장이 같은 원주민들과 싸우려니 우스운 생각도 들었으나 그들은 음흉하고 잔인하다는데서 방심할 일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삼도에서 군막을 설치한 그 날 밤 야음을 틈타 원주민들이 습격해 왔다. 그들이 천막을 에워싸기를 기다려 몰래 숲속에 매복시켜 놓은 군사들에게 북을 쳐 공격을 명했다. 원주민 반란군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받아야 했다. 적은 궤멸되고 살아남은 적들은 도망을 쳤다. 언파불합 장군은 지리에 어두운 아군이 실수라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추격을 중단시키고 낮에 적의 진지를 휩쓸어 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척후가 보고한다. ‘궁궐이 있는 산성 밑에 놈들의 진지가 있습니다. 진지는 통나무로 만든 움막 같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돌도끼와 몽둥이 뿐이었습니다.’ 원래 삼도의 원주민과 원정군과의 싸움은 싸우기도 전에 먼저 승패가 갈린 싱거운 싸움이었다. 그들이 원정군의 칼, 창, 활 등의 무기를 한 번이라도 본 일이 있다면 희생을 무릅쓰고 싸울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원정군이 원주민군 진지를 엄습해 들어가자 원래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인지라 금방 진지가 무너졌다. 그리고 그들은 항복했다. 언파불합 장군은 더 이상의 희생자를 내지 않고 반란군 지도자들을 데리고 산성의 궁궐로 들어갔다. 협야노의 후손들과 조선에서 흘러 들어간 하이도인들이 언파불합 장군을 맞아 승리의 축하연을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언파불합 장군은 반란군 지도자들에게 이후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것이 첫 번째 일본에 대한 조선의 원정 기록이다

 그 후 반세기 동안 삼도는 평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이후 기원 전 617년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또다시 원주민들의 반란인 것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배반명(裵槃命) 장군을 보내어 반란을 진압했다. 이것이 두 번째 원정이다. 그 이후 왜군은 수천 년에 걸쳐 수 없이 조선을 괴롭힌 집단이 되었으며, 고려 말 원나라 통치기간 중 여 . 몽 연합군이 두 번에 걸쳐 일본으로 쳐들어 간 일이 있다. 두 번 모두 전쟁에는 확실하게 이겼지만 거센 바람을 만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바람을 일인들은 가미가제(信風)라 하여 그 신풍을 일으킨 신에 대한 신앙심을 더욱 굳건히 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느 역사가는 말하기를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역사 이래 수천 번의 외침을 잘 막아내어 이처럼 열강들 틈바구니에서도 잘 버티어왔으며, 단 한 번도 국경을 넘어 외국을 침략해 본 일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민족이라느니 하지만, 위의 전쟁기록 만으로도 사실이 아님을 말해준다. 침략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말은 결국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대한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지 미화일 뿐, 약자의 변명 치고도 너무 궁색하기만 한 변명일 뿐이다. 우리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북부여, 그리고 삼국 시대 까지 우리겨레는 힘이 넘치는 역동성을 발휘하여 적의 침입에 방어전을 펴는 한 편, 수많은 침략전쟁의 주인공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자랑해야 옳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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