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 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았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 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 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 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그 가운데 예수와 서 있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이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할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여기서 간음한 여인을 고소할 조건이라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등이 혈안 되어 찾은 실제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진퇴양난에 빠뜨리려는 데 있었다. 만약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대답하시면 예수님으로 로마법 위반자로 고소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에서 사형을 구형할 수는 있었으나 집행에는 로마 총독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평소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에 모순되어 대중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반면에 죽이지 말라고 하시면 모세의 율법을 깨뜨린 죄목으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유죄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땅에다 쓴 내용은 재판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간음한 여자를 고소한 모든 사람들의 죄목을 하나하나 적어놓고 이래도 너희가 죄 없는 자들이냐를 묻고 있는 셈이니 그들이 양심에 찔려 돌을 버리고 슬금슬금 사라진 것이다.
 ‘생각하는 백성이어야 산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 등 많은 저서로 국민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고, ‘씨알의 소리’ 등을 창간하여 한 결 같이 바른 소리로 일관하다가 일정 때 수감생활을 하며 모진 고통을 겪은 함석헌님이 젊었던 시절 3.1 운동에 직접 참여하면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적 기독교 정신을 깨우쳐 오신 분이다. 교육을 통해 민족의 새로운 길을 펼치고자 모교인 오산학교에 재직하면서 올바른 역사 교육을 하던 때의 일이다. 하루는 동료 직원들 중 중학생들로부터 문제 교사로 지목받은 교사가 있어 학생들이 교무실로 쳐들어왔다. 다른 교사들은 모두 도망을 갔는데 오직 함석헌님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저 선생의 자리로 보아 문제의 선생임에 틀림없다’ 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함석헌님을 마구 때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함석헌님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었음이 밝혀지자 학생들이 몰려와 용서를 빌면서 말했다. ‘선생님은 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셨습니까 ?’ ‘내가 만일 눈을 뜨고 매를 맞았다면 내 제자들 가운데 누가 나를 때린 것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 그렇게 되면 어떻게 내가 강단에 설 수 있고 어떻게 나를 때린 제자들도 나를 다시 보겠는가 ?’

 ‘아버지는 자신이 의사이면서 왜 아버지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고 돌아가시렵니까 ?’ 어린 소년은 병상에 누운 아버지를 향해 투정을 부렸다. 그 때 그의 아버지는 남은 기력을 다해 실낱같은 목소리로 ‘그래, 나는 남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로 일 해왔다. 그러나 너는 이   다음에 반드시 사람의 몸을 아프게 하는 병보다도 사람의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어라’ 이렇게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페스탈로치가 소년시절에 자기 눈앞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주고받은 이야기다. 페스탈로치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부인과 함께 고아들을 모아 자선학교를 열어 글을 가르치며 돌보아 주었다. 의사였던 아버지 요한은 페스탈로치가 9세가 되던 해에 병으로 별세한 것이다. 페스탈로치는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실천하는 따뜻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개신교 목사인 그의 할아버지는 가난한 교우들에게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고, 어머니는 두 아들을 혼자서 돌보면서도 고아원에 틈틈이 음식과 옷을 보내고는 하였다. 별세한 그의 아버지도 가난한 사람들을 주로 진료하였다. 그는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여 학업 성적은 좋지 못하였으나 취리히에 있는 취리히 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취리히 대학교에 재학 중 사회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때 만난 안나와 1769년에 결혼하였다. 노이호프에서 20여 명의 어린이들과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공동야학을 열었으나 주위사람들의 시기로 실패하였다. 이 실패로 페스탈로치는 무일푼이 되었고, 건강도 나빠지고 말았다. 이때 아내 안나도 병으로 별세하여 가정부 바벨리 외에는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1798년 스위스 정부의 요청으로 고아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1799년 폐쇄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이후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그의 교육관을 실천하였다. 가정은 도덕상의 학교다. 가정에서의 인성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정의 단란함이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이다. 그리고 자녀를 보는 즐거움은 사람의 가장 거룩한 즐거움이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난할 때 감격하기를 잘한다.  마음이 겸허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고 항상 부족하게 생활한다는 그 자체가 가난한 사람을 겸허하게 하고, 감격하게 하는 것이다.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는 조국에 충실히 봉사하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 우선 좋은 부모, 좋은 자식, 좋은 형제, 좋은 이웃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나아가 이웃과 나라를 위해서도 건강해야 한다. 요새를 지키듯 스스로 건강을 지키자. 고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자신에게 순수한 인격이 없다면, 어두운 그늘이 그를 둘러쌀 것이다. 그러나 천한 오막살이에 있을지라도, 교육된 인격은 순수하고 기품 있는 만족된 인간의 위대함을 발산한다. 고난과 눈물이 나를 높은 예지로 이끌어 올렸다. 보석과 즐거움은 이것을 이루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교육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수단임을 말해준다.

 자신의 모습은 돌아보지도 않고 오로지 남의 잘못만 눈에 들어오는데 자신도 모르게 젖어들고 있는 오늘의 세태와는 점점 멀어져가는 공허한 느낌마저 지워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서로 탓하기에서 홱 돌아서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탓하기가 아닌 사랑의 빚만 앞 다투어 짊어 질 때를 맞이한 것이다. 바로 지금 ‘나는 괜찮은데 네가 문제(I'm-okay-and-you're-not syndrome)'라는 터무니없는 자가당착적 모순의 포로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길로 들어설 때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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