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역사를 내다 버리는 자 그 역사에 떠밀려 그 흔적마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일어서기 이전 잠깐 일제의 강점기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근세의 뿌리는 조선사일 수밖에 없다. 웅혼하고 화려하게 빛났던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등의 고조선에 이어 역동성이 넘치는 삼국시대에 비한다면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의 조선이지만 그 어느 부분의 역사도 우리에게는 하나같이 소중한 유산임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역사를 통하여 과거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을 접하게 되고 또 그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과 결말을 보면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고 여기서 얻은 예표에 따라 앞으로 나아갈 올바른 방향 설정에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이 역사 자료라는 말이다. 지금도 조선시대에 비해 국제적 환경이 크게 다를 것 없는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버티어 왔지만 사실상 명(明과 청(靑)의 보호 아래 현실에 만족한 군주와 신료들을 중심으로 한 몸보신(無事安逸)으로 인하여 나라의 발전은커녕 나라를 통째 외세에게 갖다 바치는 비참한 결말을 가져 온 것이다. 쥐구멍에도 햇빛이 들 수 있는데 조선이라고 웅비할 활력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속 이어 갈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한 예가 고려 말 최무선으로부터 시작 된 화약 무기의 수준이 조선 초에 명나라 화약 무기 보다 우수한 세계 최강의 무기로 발전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 발전시키기는커녕 외국 사신들 앞에서 화려한 불꽃놀이 등 오락과 무력시위 적 자랑만 늘어놓으면서 상대에게 겁을 주어서 조선에 대한 침략할 꿈도 꾸지 못하게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조선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을 동안 오히려 그들은 이에 크게 자극 받아 몰래 화약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가져 온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말이다.
 문약으로 흐른 조선 사회의 병폐는 중국의 안보 우산 밑에서 다른 경쟁 상대가 없었다는 점을 주된 요인으로 돌려야 할 것이고, 공허하기만 한 성리학에 매달려 이를 무기로 신료들 끼리 감투싸움으로 일관했던 당쟁을 빼 놓을 수 없다. 사람에게 적당할 정도의 스트레스, 긴장이 삶의 활력이 된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꾸라지를 공수할 때 그냥 공수하면 절반이 죽지만, 그 속에 메기를 한 마리 집어넣어 둔다면 메기 배를 채울 미꾸라지 몇 마리만 희생되고 나머지는 팔팔하게 살아서 공수된다. 스트레스의 효과인 것이다.

 실천이라고는 없고 허울과 명분만 내세우는 성리학적 위선에 대해 실학자들은 몹시 싫어했고 특히 박지원과 김옥균은 그런 사람들을 벌레로 여겼다. 상민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양반집 아이들에게 자신을 ‘소인’이라고 낮춰가며 그들로부터 반말을 들어야 하고 외출 나갔다가 양반 행차라도 만나면 멀리 비키거나 땅에 엎드려야 하며, 벼슬 없는 양반을 만나도 한 쪽에서 머리를 숙이고 서 있어야 했다. 말을 타고 가다가 양반 집 앞을 지나가려면 말에서 내려야 하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70평 이상의 집을 지을 수 없었다. 은수저를 쓸 수도 없고 비단 옷이나 도포는 못 입고 가죽신도 신지 못했다. 천민의 딸은 시집갈 때 가마를 타지 못하게 해서 널빤지를 타고 갔으며 비녀도 못 꽂게 해서 백정의 딸이 시집갈 때 꽂았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기도 했다. 조선은 담배 천국이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워댔다. 상민이라고 담배를 못 피우는 것은 아니지만 양반이 쓰는 장죽을 썼다간 당장 끌려가 볼기짝이 터지도록 얻어맞았다. 상민의 담뱃대는 양반의 눈에 띠지 않게 허리춤 깊숙이 꽂아야 했다. 이렇게 쥐뿔도 하지 않으면서 남을 시키기만 하는 양반들 때문에 상민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원망을 품은 채 살아야 했고 나라는 안일과 무기력, 게으름에 빠져든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양반이 되지 못해도 장사를 해서 여유가 생긴 사람들에게 조정에서 벼슬을 팔기 시작했다. 벼슬장사는 왕실의 외척인 민씨들이 주도했고 이들은 돈만 필요하면 벼슬을 팔았다. 이렇게 해서 벼슬을 산 사람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즉시 임지로 향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부임지 백성들에게 그 벼슬을 살 때 들어간 본전에다 이자까지 물어야 하는 등골 빠지는 고통을 못 이겨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허다했다. 게다가 조선은 상민과 천민만 천대한 것이 아니라 서얼에게도 올바른 사람대접이 아니었다. 서얼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나리 나 ’대감‘으로 불러야 했고 정실부인이 낳은 이복형제들에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서자는 아버지가 적자를 두지 못하고 죽어도 대를 잇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재산 상속이나 제사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자신의 핏줄인 서자를 젖혀 두고 양자를 들여와 대를 이은 것이다. 산소에 가서 시제를 지낼 때에도 자손들이 묘 앞에 늘어서서 술을 한 잔씩 따르며 절을 할 때 서자는 같이 서지 못하고 따로 서 있어야 했다. 물론 이들에게는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없었다. 서자의 자식도 대를 이어 서자였다. 양반들은 자신들이 국가를 경영할만한 경륜을 가진 특수한 계층인데 어찌 침이나 놓고 약이나 만들며 통역이나 하며 그림을 그리는 따위의 하찮은 일을 하는 천한 것들과 어울릴까 보냐 하고 멀리한 데서 중인이란 계층도 생겼다. 중인은 일반 과거에는 응할 수 없고 잡과에만 응할 수 있었고, 의료업 외에 지도 제작, 측량 기사 등의 기술직, 그리고 지방 관아의 아전, 궁궐의 궁(문)지기, 군사 조련과 경찰의 임무를 띤 하급 무관, 약관 등이 그들의 일이었다.

 앞에서 조선의 병폐들만 나열한 셈이지만 이 모든 일들이 조선시대만의 병폐가 조선의 후예들이 사는 오늘날에 그대로 살아 있는 병폐라는 데서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깊은 자성을 촉구하면서 경고해 두고 싶다. 한 번 정치꾼은 영원한 정치꾼이고 한 번 부자 되면 영원무궁토록 이를 놓지 않으려고 하고 한 번 기회를 잃은 사람에게는 가혹하게 그 재기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하는 각박하기만 한 사회로 치닫고 있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처먹고 놀면서 싸움질이나 하는 국회의원이 300명이나 되고, 경찰과 전경을 거지보다 얕잡아 보고, 공산국가가 아니면서 오로지 좌익만이 개판치고, 대통령 알기를 초등학교 반장보다 못하게 여기고, 우리 대한민국을 때려잡겠다고 으르고 겁주는 깡패 나라에게 햇빛 한다고 열심히 돈 주고, 국가와 사회에 해악이 되고 파괴시키는 이념으로 마음대로 가르치는 교육, 부모가 죽으면 삼일장으로 끝내면서 여행가다 죽은 사람 위해 국민 세금으로 무한정 퍼다 주면서 목숨 바쳐 충성한 애국자들 거지돼도 그만인, 국방대책 없는 반미구호 외치면서 나라와 대통령 욕 잘해야 애국인양 설치기, 죄짓고 종교 시설에 들어가면 영웅 되기, 연봉이 수억 수십억 되는 놈들만 거리로 뛰쳐나오는 파업, 큰 돈 먹은 놈들은 단기간 고액 과징금 탕감 위해 잠깐 교도소로 나들이하기, 돈 떼어먹고 엉터리 이혼하는 가짜 신용불량, 이 모든 것들이 뒤범벅인 조선인의 후예다운 모습이니, 바로 이 시점에 여기서 뼈저린 자성과 반전의 반면교사를 반드시 찾아야 할 때임을 소리쳐 절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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