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거짓과 진실(참)은 인간에게 늘 붙어 다니게 되어 있고,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해 주는 사람은 남을 위해 나를 대상으로 한 거짓말도 하게 되어 있다, 또 인간은 누구나 늘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면서도 그 지혜로움을 남에게 들키지 않게 숨겨내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지혜로운 자가 될 수가 없다. 유일하고 진정한 지혜는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 시작임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의 그 누구보다 어리석을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또 무엇을 알더라도 간곡히 청하지 않는 한 침묵을 지키는 일이 가장 지혜로울 수도 있다. 인간의 판단, 결정, 심판 속에는 늘 거짓이 끼어들기 마련이지만 진실은 언제까지나 진실로 남게 되어 있다.
 언변이 뛰어난 노나라 사람 재여를 제자로 두게 된 공자는 제자의 재주를 아끼면서도 그 재주를 믿고 공부를 등한히 한 채 논변 자체를 즐기는 제자를 크게 질책했다. 재주가 많은 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교만과 나태가 드러난 것이다. 공자는 그가 자칫 자신의 재능만을 믿고 학행을 게을리 하다가 꾸준히 노력하는 범재(凡才)만도 못한 사람이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하루는 재여가 공자에게 물었다. 3년 상은 너무 깁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행하지 않으면 예가 반드시 무너지고 3년 동안 음악을 익히지 않으면 음악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해가 지나면 묵은 곡식이 이미 없어지고 새 곡식이 밥상에 오르고 또 나무를 문질러 얻은 새 불씨를 모시니 상기(喪期)도 1년이면 그칠 만합니다.‘ 공자가 반문했다. ’1년 상으로 한 다음 쌀밥을 먹고 비단 옷을 입는 것이 너에게 편안하냐 ?‘ ’편안합니다.‘ ’네가 편안하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무릇 군자는 3년의 거상 중에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고 거처해도 편치 않기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너에게 편하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재여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재여의 어질지 못함이여,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된다. 3년 상은 천하의 통상적인 관례이다. 재여는 도대체 그 부모로부터 3년 동안의 사랑을 받기나 했던 것인가 .‘어찌 보면 재여의 주장이 아주 틀린 것이 아닐 수 있다. 3년 상은 상황에 다라 변용할 수 있는 것으로 반드시 형식적인 상례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부모의 상을 당했을지라도 전쟁과 같은 국가 위기 상황에는 중도에 상복을 벗고 전쟁터로 나아갈 일이 먼저라는 것이 그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기리는 이른바 심상(心喪)이 마음에서 떠나서는 안 될 일이다. 공자가 재여의 청을 허락하면서도 어질지 못함을 탓한 것은 재여가 심상의 취지를 드러내지 못한 채 상기의 단축만을 주장한 데 있다. 공자가 형식적인 3년 상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공자는 사람을 평가할 때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예전에 나는 남을 대하면서 그의 말만 믿고 그의 행실을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남을 대하면서 그의 말을 들은 뒤 그의 행실을 살피게 되었다. 재여로 인해 이를 고치게 되었다.‘ 공자 같은 성인도 재여(宰予)의 뛰어난 언변에 혹해 그의 교만하고 나태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던 사례를 보여준다.

 명군은 친척일지라도 뛰어나기만 하면 피하지 않고 밖으로 사적인 원한이 있을지라도 탁월하기만 하면 이를 피하지 않고 등용한다. 그 누구일지라도 언행이 실적과 부합하면 발탁하고 그렇지 못할 때 내친다. 암군은 신하의 속마음과 언행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면서 남의 말만 믿고 국사를 맡긴다. 그 화가 작을 경우 군주의 명성이 땅에 덜어지거나 영토가 줄어   드는 데 그치지만 클 경우 나라가 망하고 왕족이 몰살을 당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으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성자 바울(Paul) 조차도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 완강하게 도사리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보여 주는 탄식어린 양심의 절규이다. 선악의 갈등으로 고민하는 인간의 양심을 숨깁 없이 보여주고 있다. 내 마음이면서 내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이 불가해한 마음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결정하거나 지배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결국 인간의 마음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좌우한다고 할 때, 바로 이 마음을 바른 길로 이끌어 가야 할 지침이 있어야 한다는 귀결에 도달하게 된다. 딱 부러지는 명쾌한 답을 내어놓기는 쉽지 많지만 나름대로의 몇 가지 해법은 제시할 수 있다.
 먼저 굳센 의지(强心)이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벌판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자란 나무라야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강한 사람만이 유혹을 뿌리치고 난관을 극복하여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다. 약한 마음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강한 정신력이야말로 위대함을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이 굳센 의지는 또한 바른 마음(正心)의 바탕 위에 서야 한다. 정직하고 거짓이 없고 사악함이 없는 인간의 마음을 가리킴이다. 광명정대(光明正大), 이것이 곧 승리의 길이자 성공의 길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고귀한 삶이 그냥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바른 삶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노력에 게으름이 끼어들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양심의 명령에 따르고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신의를 지키고 열심히 일하면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라는 말이다. 이 바른 마음은 또한 어진 마음(仁心)을 동반하지 못한다면 자기 혼자만의 바른 마음이 되어 고집불통으로 흐르거나 사회에 해악이 될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 용서 너그러운 배려, 온화함, 그 위에 꺼지지 않는 사랑, 이런 따뜻함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누구에게나 넓게 열리는 마음(開心)이 곁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가치 있는 그 무엇을 성취하기 위한 집중력(一心)을 잃지 말아야 할 일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는 모든 일이 집중력에서 나온다.
외적인 아름다움이라 해서 그냥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겉모양의 아름다움이 내면의 아름다움과 어우러질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또 서로 사랑한다면 둘이 참여해서 둘 다 이기는 싸움에 뛰어든 것이다. 언제나 인간에게 선택의 과제가 되기도 하는 겉모양과 내면, 이 둘 중에서 겉모양을 아주 무시해서도 안 될 일이지만 내면을 아름답게 가구는 일에는 평생 한 시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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