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조선의 오백년 역사를 통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가장 안락했거나 궁핍할 때가 언제였던가를 생각할 때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시대가 성군을 맞아 아쉬울 것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세종대왕 시대가 그 어느 때 보다 안락한 시대일 것이고, 반면 가장 궁핍할 때가 희대의 폭군 연산군 시대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 반대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 받는 세종 집권 초기 십여 년간은 나라에 전쟁이나 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거듭되는 가뭄 등의 흉년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백성들의 삶이 어려웠고, 폭군으로 광분하여 날뛰던 연산군 때에 백성들의 삶이 가장 풍요로웠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세종대왕 집권 후기에는 나라의 창고가 곡식으로 넘치고 연산군 집권 말기에는 나라의 창고가 텅 텅 비어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상식적 추정을 무색케 하는 일이다. 백성들의 삶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세종대왕에게 자연재해로 인한 흉년이야말로 어떤 일 보다 우선해서 막아야 할 대상이었고, 이 절박한 필요를 감당하기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관비가 낳은 천출의 장영실이다. 그는 천한 노비 출신이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일을 마치고 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틈이 병기 창고에 들어가 녹슬고 망가진 병장기와 공구들을 말끔히 정비하여 현감의 신임을 얻었다. 고달픈 노비 생활에 틈만 나면 쉬고 싶을 일이련만 그는 스스로 일을 찾아 그 찾아낸 일을 완벽하게 해 내었던 것이다. 일 자체가 좋아 스스로 일을 찾아다닌 것이다.  장영실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났더라도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세종대왕이라는 탁원한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재주는 썩고 말았을 것이다. 세종은 나라가 바르게 서려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한다는 데서 농업의 발전과 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 고심했다. 절기와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알맞은 시기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가뭄과 폭우 등 자연 재해에도 적절히 대비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태종 때부터 전문 기술자로 궁중에서 일하던 장영실은 세종 3년(1421년) 천문기구의 제작을 연구하기 위해 명나라로 유학하였다. 유학에서 돌아온 장영실은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器)를 보완한 공로로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이어 천문관측 기구 제작에 착수하여 우리의 현실에 맞는 수시력(搜時曆)제작에 착수하였다. 장영실은 의천과 더불어 간의(簡儀)를 만들어 한성의 위도를 다시 측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많은 기기들을 제작하였다. 이어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渾天儀)를 만든 다음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어 조선의 표준 시계로 사요하게 되었다. 또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혼합한 옥루(玉漏)를 만들었으니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 일 까지 아려주는 다목적 시계인 것이다. 이어 일반 대중용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구)와 밤낮으로 시간을 잴 수 있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해의 그림자에 따라 절기를 알 수 있는 규표(圭表)를 만들었다. 그는 또 금속활자를 만들어 고려 때의 인쇄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수  많은 장영실의 발명품 중에서도 농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측우기의 제작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훌륭한 업적의 하나다. 이렇게 순간순간마다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능력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의 성공에 따라온 것이다.

 갈릴레이는 중세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로 코페르니쿠스와 브루노의 계보를 이어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종교가 정치의 위에 군림하고 있었으므로 과학자들은 종교의 틀에 갇혀 자유스럽게 과학발전에 몰두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모든 자연계가 신의 창조물이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서 다른 천체가 지구를 돈다고 믿을 뿐이었다.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심도 있는 연구와 세심한 관찰로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고 설파했지만 그의 주장은 이단으로 배척되었고 교회로부터 심한 박해까지 받았다. 그의 저서 또한 그가 죽고 난 다음 출판 되었다. 또 다른 천문학자 브루노도 코페르니쿠스에 동조하다가 교회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브루노는 교회에 감금된 지 38년 만에 로마 광장에서 혀를 잘리고 화형을 당한 것이다. 1604년 갈릴레이는 새로운 별을 발견하면서 천체불변이론에 반기를 들면서 ‘잘못된 지식은 잊고 현재만을 생각하자’라고 외치면서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역설했다. 그는 1609년에 세계 최초로 천체 망원경을 만들었고 이 망원경을 통해 목성을 둘러싼 별들과 토성의 고리, 금성의 차고 이지러짐, 태양의 반점을 보았다. 그리고 태양의 반점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연구하고 태양의 자전을 증명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것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적극적으로 알렸지만 역시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위기를 맞아야 했다. 1615년 추기경이 로마에서 비밀리에 갈릴레이를 만나 다시는 사람들에게 사악한 주장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갈릴레이는 자신의 연구와 관찰을 멈추지 않았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태양의 자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였다. 갈릴레이에게는 일찍이 그의 과학을 존중하고 그의 업적을 기린 시를 써 준 친구가 있었다. 바로 그 친구가 새로운 교황으로 임명되자 갈릴레이의 저서를 읽고는 천주교 교리에 위배된다면서 가차 없이 책을 몰수했고 갈릴레이를 종교 재판에 회부했다. 1633년, 병으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재판소에 호송된 갈릴레이의 당시 나이는 68세였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고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심판이 끝난 후 감옥으로 호송되었고 1642년 1월 8일 억울함을 안는 채 세상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1980년에 이르러서야 로마 교황이 다시 이 사건을 재판에 회부하여 갈릴레이에 대한 오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전등, 전화기, 복사기, 녹음기, 영사기, 전지 등 수 천 가지를 발명한 에디슨, 그는 전등을 만들기 위해 거의 모든 내연 물질을 찾아 거의 수 천 번 거듭했다. 처음에는 석탄으로 필라멘트를 만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홀미움(holmium)을 사용했으나 매번 실패하였다. 내열성이 강한 백금을 사용하여 전등의 수명을 두 시간으로 연장하였다. 하지만 백금이 지나치게 비싸 다시 섬유로 바꿔 실험에 들어갔다. 실험을 반복한 끝에 드디어 마흔다섯 시간동안 지속할 수 있는 전등을 만들었다. 그의 실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고 대나무로 만든 필라멘트가 가장 효과적임을 알아 낸 에디슨은 1,200시간 지속하는 필라멘트를 만들었다. 1906년이 이르러 필라멘트의 소재로 텅스텐이 사용되기에 이르러서야 전등은 인류의 생활과 생산 활동에 질적인 변화를 안겨주기에 이르렀다. 에디슨의 끈질긴 고집이 보상 받은 것이다. 평소에 별 것이 없어 보이는 일이 집중력이라는 에너지가 되어 한 곳에 모일 때 비로소 천재의 업적이 결실하게 됨을 말해 준다. 절실한 필요와 강렬한 동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 그리고 일의 성취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 일궈낸 결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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