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는 중세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로 코페르니쿠스와 브루노의 계보를 이어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종교가 정치의 위에 군림하고 있었으므로 과학자들은 종교의 틀에 갇혀 자유스럽게 과학발전에 몰두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모든 자연계가 신의 창조물이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서 다른 천체가 지구를 돈다고 믿을 뿐이었다.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심도 있는 연구와 세심한 관찰로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고 설파했지만 그의 주장은 이단으로 배척되었고 교회로부터 심한 박해까지 받았다. 그의 저서 또한 그가 죽고 난 다음 출판 되었다. 또 다른 천문학자 브루노도 코페르니쿠스에 동조하다가 교회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브루노는 교회에 감금된 지 38년 만에 로마 광장에서 혀를 잘리고 화형을 당한 것이다. 1604년 갈릴레이는 새로운 별을 발견하면서 천체불변이론에 반기를 들면서 ‘잘못된 지식은 잊고 현재만을 생각하자’라고 외치면서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역설했다. 그는 1609년에 세계 최초로 천체 망원경을 만들었고 이 망원경을 통해 목성을 둘러싼 별들과 토성의 고리, 금성의 차고 이지러짐, 태양의 반점을 보았다. 그리고 태양의 반점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연구하고 태양의 자전을 증명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것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적극적으로 알렸지만 역시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위기를 맞아야 했다. 1615년 추기경이 로마에서 비밀리에 갈릴레이를 만나 다시는 사람들에게 사악한 주장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갈릴레이는 자신의 연구와 관찰을 멈추지 않았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태양의 자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였다. 갈릴레이에게는 일찍이 그의 과학을 존중하고 그의 업적을 기린 시를 써 준 친구가 있었다. 바로 그 친구가 새로운 교황으로 임명되자 갈릴레이의 저서를 읽고는 천주교 교리에 위배된다면서 가차 없이 책을 몰수했고 갈릴레이를 종교 재판에 회부했다. 1633년, 병으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재판소에 호송된 갈릴레이의 당시 나이는 68세였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고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심판이 끝난 후 감옥으로 호송되었고 1642년 1월 8일 억울함을 안는 채 세상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1980년에 이르러서야 로마 교황이 다시 이 사건을 재판에 회부하여 갈릴레이에 대한 오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전등, 전화기, 복사기, 녹음기, 영사기, 전지 등 수 천 가지를 발명한 에디슨, 그는 전등을 만들기 위해 거의 모든 내연 물질을 찾아 거의 수 천 번 거듭했다. 처음에는 석탄으로 필라멘트를 만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홀미움(holmium)을 사용했으나 매번 실패하였다. 내열성이 강한 백금을 사용하여 전등의 수명을 두 시간으로 연장하였다. 하지만 백금이 지나치게 비싸 다시 섬유로 바꿔 실험에 들어갔다. 실험을 반복한 끝에 드디어 마흔다섯 시간동안 지속할 수 있는 전등을 만들었다. 그의 실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고 대나무로 만든 필라멘트가 가장 효과적임을 알아 낸 에디슨은 1,200시간 지속하는 필라멘트를 만들었다. 1906년이 이르러 필라멘트의 소재로 텅스텐이 사용되기에 이르러서야 전등은 인류의 생활과 생산 활동에 질적인 변화를 안겨주기에 이르렀다. 에디슨의 끈질긴 고집이 보상 받은 것이다. 평소에 별 것이 없어 보이는 일이 집중력이라는 에너지가 되어 한 곳에 모일 때 비로소 천재의 업적이 결실하게 됨을 말해 준다. 절실한 필요와 강렬한 동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 그리고 일의 성취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 일궈낸 결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