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전쟁답지 않은 전쟁, 게다가 조금만 지각 있는 판단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전쟁 자체는 너무 간단히 그리고 싱겁게 끝났지만 그 피해는 임진왜란 못지않게 감당하기 어려웠고, 특히 못난 남자들이 전쟁에서 진 결과는 처녀 공출, 환향녀 딱지 등이 말해주는 여자들의 몫이 더 무거웠다. 승전국인 청에서는 궁중의 시녀로 조선의 처녀들을 원했다. 조선은 매년 백 명이 넘는 처녀들을 청으로 보냈으며, 그 중 일부를 시녀로 쓰고 나머지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보낸 처녀가 수 십 년 간 수 천 명에 이르렀다. 청의 명을 받은 조정은 처녀를 조달하지 못해 관기, 기생, 천민들을 보냈으나 나중에는 이를 알고 조선에 호통을 쳤다. 이리하여 닥치는 대로 처녀 사냥에 나서니 전국이 곡성으로 뒤덮였고, 조혼이 늘고, 머리를 깎거나 고의로 상처를 내는 등 안타까움만 더 해 갔다. 병자호란 때 조선 침공에 참전한 후 왕이 된 도르곤으로부터 ‘왕의 누이나 딸, 왕족이나 고관의 딸 가운데 곱고 행실이 바른 처녀와 결혼 하겠다’ 고 통보해 왔다. 조정에서는 왕(효종)의 딸을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료들에게 그냥 떠넘길 수도 없어서 고민에 싸였다. 결국 종실 금림군 이개윤의 딸(16세)이 후보로 선정되었다. 그녀에게 품계를 주어 의순공주라 칭하고 공조판서 원두표를 호종인으로 하여 청으로 보내기로 했다. 청으로 떠나는 날 의순공주와 가족 모두 마주 보며 슬피 울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의순공주가 청으로 간 7년 뒤 왕이 된 도르곤이 죽었다. 청 조정에서는 그녀에게 역적으로 누명을 씌우는 등 치욕과 비운의 세월을 보내다가, 그녀의 부친 금림군이 청 황제에게 탄원하여 귀국한 다음 홀로 여생을 마쳤다.

 옛 단군조선의 제후국 중 하나인 흉노는 한족(漢族)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한의 고조(유방)가 흉노와의 전쟁에 져서 굴욕적인 화친 조약을 맺은 후 엄청난 액수의 공물과 함께 공주를 흉노에 시집보내야 했다. 한의 조정에서도 궁녀 중 가장 못 생긴 여자가 선발되기 일쑤였는데, 이유인즉 수많은 궁녀들의 초상을 그려놓은 다음, 왕이 그 초상화를 보고 동침할 궁녀를 낙점하게 되어 있었기에 그 초상화 그람으로 판단하여 제일 못난 궁녀를 선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궁녀들이 처음 입궁할 때 화공에게 뇌물을 듬뿍 주어 실물보디 훨씬 예쁘게 그려 주는 것이 상례화 된 것이다. 전례대로 초상화를 보고 추녀를 선발하여놓고 보니 천하일색을 뽑은 사건이 그것이다. 그녀는 본시 집이 가난하여 환관들이나 화공에게 뇌물을 줄 여유가 없었기에 아주 못생긴 추녀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실상 그녀의 모습은 궁녀들 중에 가장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떠나기로 한 날 황제를 알현하여 인사하는 절차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모든 대신들은 물론이고 황족들 까지 모여 사신 단을 송별하는 예를 갖추는 자리였다. 눈이 휘둥그래진 황제는 물론이고 모든 대신들의 입이 동시에 벌어져 닫힐 줄을 몰랐다. 황제는 저런 미인을 궁에서 한 번도 본 일이 없어 후회막급이었다. 그렇다고 취소하거나 변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후 기원 전 33년 흉노의 호한야 선우(왕)가 한의 공주를 원했다. 그러자 한의 원제(元帝)는 호한야 선우의 요구를 승낙하였다. 원제는 내시에게 명하여 궁녀들의 얼굴을 그린 궁녀 첩을 가쳐 오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궁녀들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고 나서 붓을 들어 한 궁녀를 지정하고 관리에게 명하여 예물을 후하게 주고 길일을 택하여 호한야 선우가 머무르는 객사로 보내 성대하게 혼사를 치르게 하였다. 혼인날이 되자 그 궁녀는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곱게 단장한 후 어좌 앞으로 나아가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 자리에서 원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 궁녀가 궁녀 첨과는 달리 빼어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쪽진 머리가 탐스러울 뿐만 아니라 꽃 같은 얼굴에 몸매가 호리호리하여 보면 볼수록 절세가인이요, 황홀하여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궁녀 왕소군(王昭君)이 이제야 천안을 뵈옵니다’ 하고 궁녀가 원제에게 절을 한다. 그녀의 황홀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원제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너는 어느 때에 입궁 하였는가 ?’ 하고 물었다. 그녀가 궁에 들어온 지는 퍽 오래 되었는데 어째서 한 번도 본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미인의 손목을 한 번 잡아보지도 못하고 오랑캐에게 넘겨주다니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남겨두면 그들에게 신용을 잃을 것이고, 백관으로부터 호색가라는 비난을 받아 체면이 깎이게 될 것이니 그야말로 딱한 노릇이었다. 원제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몇 마디 말하고 나서 그녀를 물러가게 하였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후궁으로 들어가서 궁녀들의 얼굴을 그린 궁녀 첩을 다시 내어 오라고 명하였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그림은 왕소군의 청초한 모습과는 닮은 곳이 없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여자의 모습을 대충 그린 모습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미 황제가 잠자리를 같이 한 궁녀들의 그림을 펼쳐 보니 그들의 얼굴은 모두 정성들여 그린 것으로 원래의 모습 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울컥 화가 치민 원제는 궁녀 첩을 내던지며, ‘어느 가증스런 화공 놈이 그린 것인지 미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일부러 추하게 그린 데에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하면서 즉시 왕소군의 얼굴을 그린 화공을 불러오라고 호령하였다. 그 담당 관리는 장안의 화공들을 모두 불러들여 일일이 문초한 끝에 이름이 모연수라는 장본인을 찾아내었다. 그는 왕소군의 얼굴을 그리면서 모든 궁녀들이 그러하듯이 뇌물을 받아먹으려다가 그녀가 너무나 도도하게 굴며 뇌물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자 달빛 같이 우아하고도 청순가련한 박꽃 같은 얼굴을 풀죽은 목석인양 무표정한 얼굴로 듬성듬성 대충 그리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모연수는 사형에 처해졌다. 왕소군은 왕양의 딸로 그녀를 그린 모연수는 이름 있는 화공으로 초상을 잘 그리기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나 뇌물을 밝히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원제는 그런 미인이 후궁에 파묻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다. 왕소군을 아내로 맞은 호한야 선우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고 의기양양하게 왕소군을 데리고 가서 그녀를 애지중지 보물로 여겨 영원히 뜨겁게 사랑할 것을 맹세했다. 왕소군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끝내 흉노 땅에서 일생을 마쳤는데, 그녀의 무덤에서 자란 풀을 사람들은 청총(靑冢)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재상 청음 김상헌에게 관직 있는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고민으로 털어놓았다. ‘안사람이 뇌물을 받는다고 비난이 들끓습니다.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 ‘방법은 간단합니다. 부인이 말하는 것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 자연히 청탁이 없어질 것입니다. 부인의 뇌물 받는 습관 또한 없어질 것입니다.’ 청음의 대답이다. 뇌물의 작용으로 사실이 뒤집히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말해준다.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이들 이야기는 늘 우리의 곁을 맴돌면서 떠나지 않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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