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늘 반복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역사를 바르게 알자는 대목이다.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한반도에 정치집단이 없거나 있었다 해도 한시적인 또는 꼭두각시 같은 허약한 정권이 잠깐 섰다가 사라진다는 등의 정권 부재의 식민지로서의 조그만 땅이 동쪽 바다를 향해 불쑥 내밀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사업에 착수한 후 맨 첫 작업이 역사 왜곡이고 그들이 조선에 대해 후하게 쳐 준다는 것이 이천 이백년이고 그것도 단군을 신화의 인물로, 그 뒤를 이어 수백 년 동안 중부 이북이 안 한(漢) 나라의 지배아래서 벗어나지 못한 식민지로, 그 남 쪽은 일본이 지배한 다음 겨우 허울뿐이 자체 정권이 생겨났다는 것으로 대외에 홍보하고 있다. 이를 한 술 더 뜬 중국의 홍보책자에 한국을 설명할 때에는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한 부산물로 뿌리 역사라고는 없는 ‘대한민국’이란 신생국이 탄생한 것으로 소개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런 작태는 그들의 소행이니 참을성 있게 바로잡아나가야 할 일이지만, 이보다 앞서 우리 자신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회복하고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잡아놓아야 할 일이련만 어쩐 일인지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뿌리를 자르고 비틀어 놓은 우리 역사를 그대로 후세대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바른 역사를 외치치 않을 수 없다. 비뚤어진 역사의 시작이라면 우선 한 무제가 위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조선을 한사군을 설치하여 식민지로 다스렸다는 부분인데, 이는 단군조선의 한 변방(지금의 중국 갈석산에서 북경에 이르는 지역)이었던 번조선 지역을 일시 점령했던 위만 정권이 무너지고 그 땅을 한(漢)이 흡수하려 하였으니 단군조선의 후신인 부여 등에게 참패하여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한 사건을 마치 한(漢)이 단군조선을 계승한 위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땅을 아우른 것처럼 일본인들이 비틀어 놓은 것을 우리가 사실인양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나라이든 흥망성쇠를 피해 갈 수 는 없으니 단군이 건국한 기원 전 2333년으로부터 2096후에 막을 내리기 까지의 과정에서 후반부에 허약해 진 단군조선의 47세 단군 중 45세 여루단군 때부터 연(燕) 나라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46세 보을 단군 때에는 단군조선의 일부인 번조선 68세 왕인 해인(解仁)이 연나라 자객에게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이어 보을 단군이 한 개(韓介)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장군 고열가(高列加)가 내란을 진압하고 신료들의 추대를 받아 47세 단군의 위에 올랐다. 훌륭한 장군이었던 고열가 단군도 통치자로서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장수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고열가 단군은 오가(五加)에게 새 단군을 추천할 것을 부탁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니 이로써 2096년의 단군조선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때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단군조선 의결기관인 오가의 추천을 받아 단군의 위를 계승하면서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고치면서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지만 전 영역을 흡수하지는 못하였고 열국(列國)시대가 시작되면서 북부여, 동부여, 서부여, 낙랑국, 남삼한(마한, 진한, 변한), 옥저, 동예 등 여러 나라가 형성되었다. 열국시대는 그 후 사국(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거친 다음 가야가 빠진 삼국시대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열국시대에 대(북)부여 6세 고무서 단군이 자신의 둘째 딸 소서노와 주몽을 혼인시키고 대통을 잇게 하니 그가 대부여의 7세 단군이자 국호를 고친 고구려의 창업자이다. 고구려를 중국사에서는 900년으로 적은 이유는 해모수를 건국 연대로 잡기 때문이며, 이 때 부터 국호를 고친 고구려를 창업으로 볼 때 700년이 될 것이다.

 고구려의 등장은 북부여 이래 열국시대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고구려 3세 대무신 열제는 동부여 3세 대소 왕을 물리쳐서 동부여를 고구려에 귀속시키고 이어 최승이 세웠던 낙랑국을 병합하였다. 대무신 열제의 아들 호동 왕자가 낙랑국의 공주로 하여금 자명고를 찢게 한 유명한 사랑 이야기가 이때의 사건이다. 동부여 대소의 아우와 그 유민이 세운 갈사부여, 대소의 종제가 세운 연나부여도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거나 편입되었다. 이로써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열국을 모두 통합하였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라이므로 북부여를 원고구려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망하고 대중상이 세운 대진(大震)도 처음에는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였다. 한반도 북쪽에서 이 같은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남삼한(마한, 진한, 변한)에서 형성되었던 소국가 연맹체는 백제, 신라, 가야로 계승되었다.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 중 온조가 백제를 세우고, 진한은 신라로 발전하였으니 이들 모두가 부여의 후손들이다.
 이제 다시 중국인들이 외치고 있는 이른 바 그들이 말하는 동북공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후일 한반도 북부를 다시 점령할 경우 세계 언론으로 하여금 이를 묵인케 하려는 데 있다. 동북공정은 단순한 과거사 침탈에 그치지 않고 영토 침탈이며 한국의 존재까지를 위협하는 수단이자 공작이다. 그들은 장래의 여론 조장을 위해 동북공정 이론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지속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동북아를 완전히 점령하여 지구촌의 패자가 되고자하는 그 야욕 앞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첫 걸음은 우리 자신의 역사인식을 바르게 돌려놓는 것이 그 시작이다. 세계 제패의 꿈을 놓치지 않으려는 일본 또한 시민지 사관을 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더해 가는 것 같다. ‘조선인은 예로부터 여러 나라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온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빠진 민족’으로 묘사하여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것이 일제 식민지 사관의 요지다. 이러한 식민지사관의 정립과 실현을 위하여 일제는 조선침략을 군사적으로 준비함과 동시에 자국의 사학자들을 동원하여 한국사를 연구하게 하였다. 정치적 목적에 근간을 둔 한국사 연구는 한반도 지배가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들 멋대로 역사를 뜯어 고친 근거가 된다. 이들 일본의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조상의 무덤과 집터를 파헤쳐 꺼낸 유물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려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고증되지 않은 기록은 대부분 불신한다. 이런 실증사학의 정신에 따라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태고 때의 환. 단 시대를 고증되지 않은 신회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위만조선과 한사군’ 시대를 한민족의 상고시대라고 정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한국인의 뿌리역사는 뽑혀 나간 채 그 빈자리에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채워 넣은 것이다.
 자신의 시원역사를 잃어버리고 사는, 혼 빠진 한민족 !, 이것이 오늘날 한민족이다. 이제는 한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진실을 알고 살아야 할 때가 되었다. 한민족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될 때 오늘날,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나아가 미래를 차유하기 위한 등불을 밝힐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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