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지금의 세상에 와서 옛 시대의 양반과 상놈을 입에 올린다는 것이 그다지 적절한 화제가 못 될 수는 있겠지만, 사람에게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 또는 개개인 누구에게나 소중하다고 하면 소중한 가치일 수 있고, 또 어쩌면 알량하게만 보일수도 있는 ‘자존심’이 겉모습만 치장한 채 옛날의 양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인간 만사가 거기에는 늘 눈에 잘 띄지 않는 양면성 또는 내면성이 내재되어 있어 흑백논리 또는 단순한 이해관계 같은 것만으로 단순한 평가나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일이 너무 많다. 멀지 않은 우리 역사 중에 양반의 역사 또한 그냥 흘려 넘겨버리기에는 우리에게 비쳐 줄 소중한 교훈들을 그냥 쓰레기통에 쓸어 담아버리는 느낌이 든다.
 되돌아보면 고조선에서 삼국시대, 고려조에 이르기 까지 백성들의 신분 차별이 심하지는 않았고, 조선 시대에 이르러 유학(儒學)을 국시로 하면서 이른 바 양반과 상놈을 뚜렷이 구별하여 대대로 그 신분이 이어질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 된 것이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는 약 10% 정도의 양반이 있었고 나라 운영 기반이 이들 양반들만을 위한 나라라 해도 좋을 만한 정치였다. 양민은 양반의 수탈 대상에 지나지 않았고, 모든 군역과 노역, 조세의 원천이었다. 또 노비와 천민은 마소 대신 부려먹고 상속이 가능한 말하는 짐승들이었으며, 서얼은 사회 진출의 길이 막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신분 자체가 능력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출생에 따라 달라진다는 데에 그 근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생김새가 똑 같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언어를 쓰는 동족을, 출생 신분이 다르거나 가난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짐승 취급을 하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몽진 길에 오르자마자 왕궁을 불태워버린 백성들의 마음인들 오죽했겠는가 싶다.

 원래 양반이란 동반인 문관과 서반인 무관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궁에서 조회할 때 남쪽을 향한 왕의 동쪽에 서는 반열이 문관이고 서쪽에 서는 반열이 무관이었다. 그 이후 양반이 지배층을 가리키는 지칭이 되면서 양반은 지배층인 소수 특권층으로 자리잡아갔다. 자신으로부터 4대조 이내에 9품 이상의 관직에 나간 사람이 없으면 양반 신분을 상실하고 양민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관직에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과거 준비를 해야 했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양반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가문에서 양반과 혼인을 맺는 방법이 그것이다. 과거의 내용은 사서삼경을 얼마나 잘 알고 시구를 얼마나 잘 짓느냐는 것이니 학문 치고는 알맹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공허하다는 생각만 든다. 백성의 90%를 차지하는 백성들의 생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방해만 되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일단 과거에 합격하면 대개는 지방 수령이 되어 임지로 나가면 입법, 행정, 사법 등 삼권을 모두 장악하는 절대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들의 학문적 바탕이 사서삼경이 있으니,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천적 지식이 들어설 자리에 실생활과 전혀 무관하고 공허한 사서삼경과 시 귀 뿐이었던 것이다.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업무를 모를 뿐 아니라 처리할 능력도 없어서 목민관이 되면 옛날부터 그 지방에서 일해오던 아전들에게 기대게 되었다. 이 아전들은 월급이 없었지만 목민관의 무지에 힘입어 관권을 휘두르며 백성들을 쥐어짰다. 이처럼 조선의 정치제도는 백성들을 수탈할 수 있는 구조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싹이 트게 된 18세기에 들어서자 가난한 양반은 부유한 양민보다 못했고, 부유한 양민이나 속량된 천민들이 돈으로 양반을 사서 양반으로 행세하는 바람에 원래 전체 인구의 5-10%이던 양반이 30-40%에 이르렀다. 또 그 이후 유학(儒學)을 양반의 기준으로 하면서 양반의 숫자는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났다. 11대 중종 때부터는 군역을 대신하기 위한 면포나 현금 공납을 빠지고도 군역 자체를 면하려는 온갖 수단들이 동원되었다. 양반은 군역 또는 군역 수포제에서 제외 되어 있었으니 모두 병역 기피자들인 셈이다. 그러니 상민이나 천민을 아전이나 수령에게 줄을 대 뇌물을 써서 유학에 명부를 올림으로써 병역을 기피했다. 유학들은 군에 안 가니 당연히 양반이었다. 그러니 양반과 양민의 구별은 군에 가는 가 또는 군포를 바치느냐가 기준이 된 것이다. 또 양민과 상민의 구별을 족보 기준으로 하게 되자 천민 중에는 누구나 양민이 되려고 양민의 족보에 들어가려고 기를 쓰게 되니 이들을 도와주는 척 하면서 이익을 취하는 모리배 집단도 생겨났다. 양반 중에도 등급이 있었다. 상층 양반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한 집안이나 저명한 학자 혹은 고위 관리의 자손들이고, 중층 양반은 과거에는 합격했으나 관로에 오르지 못하고 좌수나 별감 등을 지내면서 그냥 양반 행세나 하고 돌아다닌 사람들이고, 하층 양반은 뇌물로 산 엉터리 양반들이었다.

 조선을 망친 장본인들이 바로 이 양반들이었으니, 이들은 위선과 허풍, 그리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 학식자랑이 고작이었으니 이들은 처음부터 나자를 갉아먹어 들어가고 있던 기생충 같은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양반은 일을 하면 안 되었다. 자기 밭에 난 잡초 한 포기도 자신이 뽑으면 안 되고 꼭 사람을 불러 뽑아야 했다. 또한 농업, 상업, 공업 등의 천한 일을 하면 절대 안 되었다. 이것이 바로 조선을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로 만드는 지름길이었다. 조선의 상놈들이 청국으로 가면 기능인으로 대접 받았고 역시 상놈인 도공도 일본에서는 스승의 대접을 받았다. 양반을 빼면 사람이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의 상민들이 외국에서 받은 대접이 그렇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은 손으로 돈을 만지거나 세어서도 안 되고 하루에 세 끼 먹는 쌀값을 물어서도 안 되었다. 공자 왈 맹자 왈은 늘 입에 달고 다녀야 했고 잘난 조상들의 족보 혹은 뇌물로 만든 위조 족보의 조상들 이름을 외고 다니는 사람들이 양반들의 일이었다. 게다가 가세가 기울어 끼니를 못 때우고 냉수로 배를 채워도 이를 쑤셔야 했으며, 추워도 곁불을 쬐면 안 되었다. 조선이 망하고 하인들이 다 떠나버린 후 양반들도 각기 제 살 길을 마련해야 했으니, 평생 일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그들이 호구지책을 찾는다는 것이 선산이나 집을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 양반집이 몰락한 뒤 집을 몇 번 옮기다 보니 우물 없는 집에 살게 되었다. 동네에 우물이 있었지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어느 날 물이 떨어졌는데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양반집 마나님은 물을 길으러 갈 수가 없었다. 비록 종들이 다 떠나갔더라도 몰락한지 얼마 안 되어 양반집이라는 것을 모두가 아는데 마나님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나가 물을 길러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양반은 결국 밤이 될 때 까지 그 목마름을 참아야 했고 밤이 깊어서야 마나님이 물동이를 이고 아무도 없는 우물에 물을 길러 갔고 이 일은 마나님이 세상을 뜰 때 까지 계속되었다. 세상이 뒤바뀌어 상놈이 양반과 맞상대 하게 되자 양반들이 화병에 걸리거나 술독에 빠지거나 제명에 살지 못하고 죽었다.
 더 이상의 무슨 얘기가 필요하랴. 우리의 공동체인 나라가 잘 되는 길이란 뒷짐 지고 큰 기침 하던 양반이 아닌 모두가 일 하는 국민이 되는 길 그것이 곧 우리 모두를 행복으로 이끄는 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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