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조선조 선조 때, 명(明)과의 관계에서 오래 전부터 이루어 내지 못한 외교적 숙제인 종계개록(宗系改錄)의 승인을 얻으려는 의무를 띤 사신들이 통주에 도착했다. 북경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통주에서 피로를 풀려는 사신 일행은 사명의 완수가 걱정 되어 마음 편할 수 없었다. 이 때 정(正). 부(副)사(使)를 따라간 역관은 외국어 학당에서 공부하던 서생 홍 순언 이다. 임무가 걱정이 되어 답답하긴 해도 통주의 길거리 구경을 나섰고, 타향에서의 울적한 심회가 풀리지 않아 호젓한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술집에서 나온 홍 역관은 얼근히 취한 기분에 등불이 휘황하게 비치는 청루 앞에 이르렀다. 집집마다 문 앞에 달린 청사초롱불 밑에는 간판이 붙어 있고 그 밑에는 백 냥 방, 이 백 냥 방, 삼백 냥 방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한 집 앞에 걸음을 딱 멈추게 하는 집이 있었으니, 그 집의 가격표에 ‘천 냥’이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집 안으로 들어서서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서면서 선녀 같이 예쁜 여자일 것으로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후원 별채의 대낮 같이 밝혀놓은 방으로  들어갔다. 천 냥짜리 여자는 그지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스무 살 가량 되어 보이는 그림 같은 이제 막 피려는 꽃송이 같은 여자였다. 여자의 눈초리에 기생과 같은 티가 하나도 없고 몸가짐 또한 그랬다. 아무리 보아도 양가 별당에서 곱게 자라난 규중처녀 같았다. ‘상공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을 찾아주시니 감사한 말씀을 어찌 다 하겠습니까 ?’ 여자가 침묵을 깨뜨린 첫 마디다. ‘원 별 말을 다 하는구려. 내 낭자의 이름을 일찍 듣고 한 번 보려고 했으나 멀리 외국에 있는 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제야 그대의 얼굴을 대하게 되니 너무 늦은 감이 있소. 그런데 그대처럼 범상치 않은 여인이 이런 곳에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 하구려’. 그러자 여자가 말한다. ‘이제 천 냥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에게 무엇을 기다리게 하겠습니까. 사실인즉 소녀는 기녀가 아니옵니다. 소녀는 어엿한 호조시랑(戶曹侍郞)의 딸이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천 냥을 쓸 곳이 있사온데 어찌 이렇게 약한 계집의 몸으로 그런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집을 팔면 천 냥 가량을 되겠으나 남은 천 냥은 구할 길이 없겠기에 부득이 이 몸을 팔려고 현판을 내 건 것이옵니다. 처녀 몸으로 한 손님만 받아서 그 곤경을 면하고 천 년 만 년 그 손님을 따라 살려고 한 것이옵니다. 그런데 상공은 외국인이어서 따라 갈 수도 없게 되었으니 눈물까지 보이게 된 것입니다’. 호조시랑인 그녀의 아버지가 불량배에게 속아 국고 금 이천 냥을 쓰고 갚지 못하여 하옥되어 있어 속죄금 이천 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늘이 내신 효녀에게 잠시나마 불측한 마음을 품은 내가 잘못이었소. 자, 여기 이천 냥이 있으니 이것으로 부친을 구하시오.’ ‘이렇게 큰돈을 이  천한 몸을 위해 동정하시에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떠나신다는 것은 부당한 줄로 아옵니다.’ ‘아니오, 이 돈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그대의 효성에 감격하여 주는 것이니 그리 알고 부담스럽게 생각 마시 오’. ‘정 그러시면 아버지를 구해주신 분을 수양아버지로 모시겠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존함을 가르쳐 주시면 저희 집 가보에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후대에 까지 전하려 하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이름을 댈만한 사람이 못 되오. 그저 홍 역관으로만 아십시오.’ 다음 날 명나라 조정에 들어 가 문제의 ‘종계개록’등 여러 가지 외교문제를 풀어보려고 하였으나 실패한 채 귀국하게 되었고, 국고 금 이천 냥을 탕진한 죄로 금부에 하옥되었다. 삼년간 홍 역관의 옥살이가 계속되는 가운데 다시 그 종계개록 문제로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실패하면 역관의 목을 벤다는 조건까지 붙었다. 역관들이 돈을 모아 이천 냥을 변상해 주고 이 일의 적임자인 홍 순언이 다시 역관으로 가게 되었다. 그들이 명  나라의 수도 조양문에 이르자 화려한 비단길로 장식되어 있고 곧 명나라의 고관 하나가 조선의 외교 사절단 앞에 와서 ‘홍 역관’이 누구인지 묻더니 그의 앞에 넙죽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장인께서 원로에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얼이 빠지게 얼떨떨한 사신 일행이 안내를 받아 간 곳이 예부시랑 석성(禮部侍郞 石星)의 저택이었고, 그는 삼년 전 홍 역관이 구해 준 여자의 남편이 되어 있었으니, 사신 일행에 대한 후한 대접은 물론, 그의 도움으로 해묵는 ‘종계개록’을 비롯한 외교문제가 해결되고 얼마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도 명에서 대 규모 원병을 파병하게 된 것도 후에 병부시랑이 된 석성의 도움이 컸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별장 김응서(金應瑞)는 용강, 삼화(三和), 증산(甑山), 강서(江西) 4읍의 군사를 모아 20곳에 의병(疑兵)을 일으켜 평양 서쪽에 진을 쳤다. 황해수사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에 웅거했다. 하지만 적이 무서워 감히 싸우는 장수는 없었다. 평양부 기생 계월향(桂月香)은 그 아름다움이 당대 절색이었다. 어떤 적장에게 잡힌 계월향은 이렇게 작정을 했다. “헛되이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니 적장의 머리를 베어 나라에 갚으리라.”실제로 그녀는 적장의 수청을 들면서 안심시켰다. 별장 김 응서를 친 오라비라며 성중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적장은 계월향의 자색을 탐애하였다. 그 적장의 성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용력(勇力)만은 소서행장의 부하 중 최고였다고 한다. 계월향은 적장이 잠든 때를 타 김 응서를 시켜 적장의 목을 벴다. 그리곤 자신도 ‘몸이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자결을 했다. 김 응서는 그 적장의 수급을 조정에 올리고 평안도방어사가 되었다.
 경남 고성 지역 외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조선 정탐을 위한 일본의 첩자가 고성에 들러 기방에 들자 이를 눈치 챈 기생 월이가 그 첩자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해서 잠들게 한 후 그의 소지품 중 고성 지역의 지도를 꺼내어 보고, 고성의 동쪽 편에 있는 좁은 바다인 배둔(당항)만이 그려진 지도에 그 바다가 서쪽 바다인 고성만으로 통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변조해 그려 넣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 떼었다. 변조된 지도대로라면 통영과 고성이 모두 섬이 되는 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좁은 배둔만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쫓긴 일본 전선들이 그들 전선의 속력을 믿고, 또 사전 정탐꾼이 그린 지도를 믿고 서쪽 바다로 빠진다는 생각으로 도망치다가 바다가 막히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망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에게 궤멸(57척) 당했다. 
 또 역시 임진왜란 때 그 누구보다 높은 충절로 길이 알려진 논개에 대한 이야기 자체는 생략하더라도, 그를 기리는 많은 노래 가운데 한 곡인 ‘쌍가락지 논개’(손 로원 작사, 이병주 작곡, 남 성봉 노래)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논개가 기생이 아니고 장수 현감이었던 최 경희의 후처가 되었다가 나중에 남편을 따라 진주로 와서 전사한 남편의 뒤를 이어 기생 복장을 하고 왜장을 유인하여 왜장을 껴안고 남강 물에 빠져 순국했다는 점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는 조금 다를 뿐이다. 

 아 아 논개야 쌍가락지 손가락 마디마다
 술잔 위에 맺힌 분노 시퍼런 칼 비수되어
 왜장 놈의 목을 끊는 남강 물에 내 청춘을 촉석루에
 진달래가 필적마다 아아 논개야 논개야 너를 찾는다
 아 아 논개야 치맛자락 열 두 폭 주름마다
 진주성을 짓밟아 논 그 원수를 그냥 두랴
 왜장 놈과 함께 빠진 의암위에 내 청춘을 촉석루에
 보름달이 뜰 적마다 아 아 논개야 논개야 너를 찾는다.

 나라 사랑에 남녀의 차별이 없고 귀천이 없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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