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어느 경전이나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른바 식자들 간에 문화가 앞섰던 중국으로부터 모든 문물을 수입해서 그나마도 미개인 또는 오랑캐란 소리나 면하고 산다고 말하기기 예사고, 한자(漢字)도 유학도 중국에서 수임한 것으로 알지만, 그와는 정 반대라야 옳은 말인즉, 우리를 낳은 우리 조상의 손에서 이웃 미개했던 화하족(華夏族)에게 문명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 한 동안 그들의 품이 있다가 돌아 온, 그저 잠시 외출 나갔다가 되돌아 온 것이 유학임을 알아야 실마리가 풀려가게 되어있다. 실상 중국의 최초 고대왕조라고 하는 하, 은, 주 모두 당시의 상국인 단군조선에게 칭신하면서 조공을 바쳤고 또 왕조에 폭군이 생기거나 하면 상국인 조선의 승인을 받아 왕조를 바꾸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위의 글은 그 출발점이 되는 가르침인데 이는 우리 조상 태초의 나라 환국(桓國 B.C 7197년 건국 3301년간 존속), 배달국(倍達國 1565년 존속)의 두 왕조가 단군조선에게 물려준 가르침이자 단군조선의 통치이념이기도 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이기도 한다. 유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공자는 제요(帝堯), 제순(帝舜)에 이은 하, 은, 주의 3대 왕조에 걸친 역사를 정성들여 편찬한 춘추(春秋)를 집필하는 데 온갖 정성을 쏟았으며 다른 경전과는 달리 단 한 자의 자구도 다른 사람에게 자문을 구한 일도 없었다 한다. 주나라 말기 쯤 이른 그의 탄생 시기인 춘추전국시대는 무질서와 술수 또는 힘만 존재하는 난장판이었으니, 이를 개탄한 선각자 공자가 인간 삶을 기준을 바로 세우겠다고 나선 그 첫걸음이자 완성이 바로 춘추라는 말이다. 그가 생각한 인간상의 모델은 요, 순, 주문왕(희창), 주무왕(희발), 주공단(희단) 등이고 정치에 있어서는 약육강식이 아닌, 어진 임금의 정치를 갈망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였지만 바로 그 왕도정치의 뿌리가 우리 단군조선이라는 점은 아무데도 드러나 있지 않다. 또 혼란스러웠던 시대에 온갖 선각자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첫 주자가 바로 공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공자는 덕치주의를 제창하여 인간의 윤리적 향상에 의해 사회의 혼란을 구하려 했다. 그는 널리 제자들을 모아 그 사상을 보급하고 교육하는 데 힘썼다. 여기에서 후일 유학이라고 불리는 중국 최초의 학파가 생겨난 것이다. 이어 이 유학의 비판자로서 묵자(墨子)가 나타나 묵가를 형성하였다. 이 유가와 묵가의 두 조류 속에서 도 여러 학파로 분화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 공자의 유학이 들어 온 연대는 명시된 기록은 없으니 이미 삼국시대 이전에 들어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불교가 먼저 자리 잡고 있던 터전이어서 인지 일반 백성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기보다는 오히려 행정의 기준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가의 제 규칙의 엄격함과 이들 규칙과 국가법과 관습법간의 모순당착은 백성들을 새 교리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왕들도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불교에 더 심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도 고려조에 이르러 이른 바 해동공자로 존경 받던 최중(崔沖)이 적극적으로 유학 전파에 나섰다. 그로부터 수백 년 후 안향이 적극적으로 유학 보급에 나섰으나 당시의 분위기로는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불교 사찰에서 아편을 피우고 불교의 승려들이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를 같이하여 공자의 사당이 몰락하고 있는 모습을 안향은 통탄하였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안향과 그의 제자들이 일구어 낸 유학 보급의 성과는 후세인 조선시대에 빛을 보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이미 모든 지식계층 사이에 큰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유학을 실생활에 적용함에 있어서 추호의 의심이나 반발의 여지가 사라진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유학의 사회윤리 도덕의 체계는 국가 종교적 위치를 갖게 되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국가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정도에 까지 이른 것이다. 국가의 공직에 임명될 때에는 공자의 지식이 요구되었으며 도교나 불교 같은 부문은 거의 금기시 되어갔다. 또 지방마다 서원이 생겨 국가고시인 과거 준비와 더불어 유학을 심도 있게 배우는 도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또 조정 내부에서는 이 유학을 꼬투리 삼한 당파사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유학을 지향하던 조선이 나중에 힘없는 나라가 되고 고종황제 때에 이르러 명성황후가 일인 역도들에게 시해당하는 도저히 주권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치욕적 사건(1984년) 있은 얼마 후(1896년) 생명의 위협을 느낀 황제가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울음을 터뜨린 비탄의 성명을 내 놓기에 이르렀다. ‘슬프도다! 슬프도다! 짐의 보잘 것 없는 그릇된 통치로 인하여 그릇된 자들이 날뛰고 현명한 자들이 물러났도다. 지난 10년간 한 때도 혼란 없이 지나 간 .때가 없었다. 이런 혼란들은 짐의 몸 한 부분과 같이 믿었던 사람들이나 집과 살과 피를 나눈 사람들이 일으켰다. 500년의 오랜 연륜을 지닌 우리 왕조가 이런 혼란의 결과로 여러 차례 위험에 빠졌고 수백만의 우리 백성이 점차로 궁핍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짐으로 하여금 수치로 얼굴을 붉히게 하며 열에 들뜨게 하였다. 짐의 편파성과 고집의 결과로 이런 혼란들이 나타난 것이며 이런 혼란들은 협잡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고 짐의 실수는 불행을 초래하였다.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짐의 불찰이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믿을만한 진정한 친구들이 있어 모리배들을 몰아내 주기를 원하고 있으니 이들 덕분에 우리는 여지껏의 실패가 국가를 강화시키고, 폭풍우가 지나면 평온이 온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니, 오랜 시련 끝에 자유를 만끽하여 만물의 도리는 실패에서 이끌어진다는 법칙에 들어맞는 얘기다. <중략>’
당파싸움이던 나라의 멸망이던 유학을 탓할 일은 절대로 아니고 모든 게 사람의 탓임을 자각한다면, 긴 우리 역사 속에는 중국과 일본을 속국으로 거느리었던 역사도 있고 조선 말기에 이어 얼마 남지 않은 땅마저 분단 된 오늘도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우리가 바로 그 영욕이 뒤엉킨 역사의 주인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