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얼른 보기에 사람은 같은 이해관계에 얽혀 있거나 어느 한 면으로든 공통된 생각이 많을 것 같아 보이지만, 겉보기와는 제각기 아주 달리 판이하게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길다 면 길게도 느껴질 수 있는 한 평생에 자신 외의 타인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해도 좋을 것 같다.
 고구려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에게는 없던 힘이 솟아나는 힘의 상징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일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국력이 한창 뻗어나가던 10대 산상제(왕)에 이어 11대 동천왕이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산상제는 원래 처자가 있었으나 큰 형이던 고국천제가 세상을 떠날 때 발기의 난이 일어났고 여기서 산상제의 전 가족을 잃고 난 후 왕위에 오른 그가 형수였던 우씨와 혼인한 후 후사가 없어 고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하여 관병들이 이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을 때 스무 살 된 처녀가 나와서 가볍게 그 돼지를 잡아 돼지 소동은 막을 내렸다. 산상제가 그 처녀를 찾아가 잠자리를 같이 한 후 아들을 낳으니 그가 동천제(東川帝)이다. 동천제는 심술 투성이 태후 우씨와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고 외척들과의 마찰도 없었다. 신하와 백성들은 동천제의 덕망을 한 결 같이 칭송하였고 이것이 곧 고구려 백성들을 하나로 묶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중국 쪽으로는 삼국시대의 1세대였던 조조와 유비 그리고 제갈량이 죽고 제각기 위, 오, 촉의 세 나라로 정립되어 있을 때다. 이 때 지금의 산동 반도와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공손연이 연나라 칭하고 또 다른 별개의 나라를 세워 자꾸만 위나라 영토를 잠식해 들어가자 위나라에서는 사마의에게 대군을 주어 토벌하기에 이른다. 이에 앞서 위나라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고 있었으므로 사마의의 원정군에 원군을 보냄과 동시 고구려 군이 공손연의 주력군을 동쪽에서 공격하자 이 기회에 사마의가 후방을 공격하여 쉽게 연나라는 무너졌다. 서진정책을 실시하던 고구려는 서안평을 공격하여 장악하고 이어 남진하여 황하를 넘어 산동 성 까지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현토를 공격하여 무너뜨렸고, 이어 산동 반도 아래의 동해국을 점령하여 그 세력을 회수까지 이르게 하였으며 태조 이래의 숙원사업을 완성한 것이다. 이처럼 동천제는 멸망한 연나라 땅의 대부분을 고구려로 편입시키자 위협을 느낀 위나라에서는 관구검을 총수로 하는 고구려 원정길에 나섰다. 위군을 비류수 근처로 유인한 고구려군은 수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다시 양맥 근처에서 수천 명을 죽인 대승을 거둔 후 동천제가 직접 철기 군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공격하다가 큰 패배를 당하면서 동쪽 옥저에 이르기 까지 후퇴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를 따르던 장수 밀우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적을 맞아 결사항전을 벌여 사경에 이르렀을 때 또 다른 결사대를 이끈 유옥규가 겨우 사경에 이른 밀우를 구출해 내었다. 이어 동북 출신 장수 유유가 적장에게 거짓 항복하면서 상(床) 밑에 칼을 숨기고 적장에게 절하는 척 하면서 그 칼로 적장을 찔러 죽이면서 전세를 반전시켰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던 고구려 군이 갑자고 공격해 오니 위 군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동천제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백성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무덤에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신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되기를 바라는 자가 많았으나, 새로 등극한 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 일에 왕릉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 많았다. 백성들이 섶을 베어 그 백 명도 더 되는 시체들을 덮어주었다. 그 때문에 그 곳을 시원(柴原)이라고 불렀다’ 덕망과 용기를 겸비하여 백성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동천제는 이처럼 안타까우면서도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춘추 시대에 위(衛)나라에서 태어난 오기는 용병에 능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에게서 사사(師事)한 일도 있으며 그 후에는 노나라에서 봉사했다. 이 무렵 이웃 제 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했다. 노나라의 군주는 오기를 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알고 보니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사람이었다. 노나라 군주의 의심을 받게 된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죽이고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크게 이겼다. 전쟁에는 이겼지만 그의 평판은 아주 좋지 않았다, ‘오기는 시기심이 강하고 잔인한 인간이다. 본래 그의 생가는 부자였지만 오기가 젊었을 때 관직에 등용되기 위하여 각지에 돌아다니며 낭비를 했기 때문에 관직도 얻지 못하고 재산만 탕진하고 말았다. 고향 사람들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비웃자 오기는 그 일에 원한을 품고 고향 사람 30여 명을 죽이고 위(衛)나라에서 도망을 쳤다. 오기는 어머니와 헤어질 때 재상이 되기 전에는 위나라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여 팔을 입으로 물어뜯어 맹세를 했다고 한다.’ 등등이 그의 평판이고 오기의 힘으로 작은 싸움에서 이겼다지만 이로써 열국의 공격 목표가 될 뿐이라는 의견이 모아지자 결국 그의 장군직 해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노나라를 떠난 오기는 위(魏)나라 문후의 명성을 듣고 그를 위해 일하겠다고 청원했다. 문후가 그의 신하 이극에게 오기의 인물에 대해 물었더니 ‘욕심이 많고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의 군사에 대한 지식은 명장인 사마양저(司馬穰苴)도 발치에 따라가지 못할 정도입니다.’라는 대답이니, 즉시 오기는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과연 오기는 진(秦)나라의 다섯 도읍을 함락시켜 이극의 말을 증명했다. 그는 언제나 가장 신분이 낮은 병사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었다. 잘 때는 자리를 갈지 않으며 행군할 때는 마차를 타지 않았고, 자기의 식량은 자기가 직접 가지고 다녔다. 또 병사 한 사람이 종기가 나서 괴로워하자 오기는 그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주었다. 그러자 이것을 안 그 병사의 어머니는 아들을 지휘하는 그 장군의 호의를 고마워하기는커녕 슬픈 울음을 터뜨리자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물었다. ‘당신의 아들은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는데 장군이 직접 고름을 발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는 것입니까 ?’ 그 말이 그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년에는 바로 그 오기 장군께서 그 애 아버지의 종기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애 아버지는 그 후 전장에 나갔습니다. 그 애 아버지는 오기 장군의 은의에 보답하기 위해서 끝까지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사우다가 죽었습니다. 들으니 이번엔 제 아들의 종기 고름을 빨아내 주셨답니다. 이제 그 애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문후는 이렇게 용병술이 훌륭하고 공평무사하여 병사들의 인망이 두터운 오기를 서하의 태수로 임명하고, 진나라와 한나라에 대비하여 변방을 굳게 수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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