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귀양’이란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는 혹독한 고문과 역적이란 굴레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되지만 원래 귀양이란 왕이 신하에게 말미를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 부족한 학덕(學德)을 더 쌓아 후일 더 큰 중책을 맡기겠다는 약속으로 보아도 좋았던 것이지만, 그 후 왕이 그를 까마득히 잊어버린다면 그것으로 끝일 수도 있다는 데서 후일 유배(流配)와 같은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귀향(歸鄕)이 귀양으로 발음된 것이다. 왕의 온정이 남아있던 시절이 지나가고, 이어 고향이 아닌 다른 외딴 곳에 유배되던 시절에 이르러서야 귀양이 무엇인지 실감하기에 이른다. 경기도 같은 도성 가까운 곳으로 유배된 신하들에게는 시국이 잠잠할 때 곧 다시 부르겠다는 뜻이고 진도, 거제, 제주 같은 외딴 곳이라면 여간해서 다시 부르지 않을 중죄에 대한 처벌로 보아도 좋다. 우리나라의 명필로 꼽히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書體)를 정립하였다. 추사의 글씨는 높은 품격과 인간적인 정취가 흘러넘친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추사는 또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어릴 때부터 학문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신동으로 찬사를 받았다. 약관의 나이에 중국(靑)에 가서 내 노라 하는 석학들과 학문적 논쟁을 벌여 그들의 경탄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보니 자신도 모르는 교만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을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결국 반대파들의 미움을 받고 정치적인 실수까지 겹쳐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됐다. 제주도에서 십 년 가까운 귀양살이를 마친 후 다시 복권되어 벼슬길에 나갈 길이 열렸으나 뜻한 바 있어 벼슬길과는 다른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긴 유배의 시간이 그를 학문과 예술을 향한 반성의 깊이를 더하게 해주는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참회하는 마음이 위대한 학문과 예술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향한 끝없는 도전과 허다한 실패 후에 비로소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먹을 가는 충분한 시간이 추사체(秋史體)를 창조해 낸 것이다. 그에게는 역경을 기회로 바꾸는 지혜가 싹트고 자라나 소망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춘추시대에 정(鄭) 나라 무공(武公)이 주변국인 호(胡) 나라를 치기로 작심했다. 먼저 무공은 자신의 딸을 호 나라의 추장에게 시집보내어 우호관계를 맺은 후 신하들에게 물었다. ‘과인은 지금 전쟁을 하여 영토를 넓히려 하는 데 어떤 나라에 쳐들어가면 좋을까 ?’ 대부 관 기사(關其思)가 진언한다. ‘우선 호 나라부터 치 십 시오’  그러자 무공은 화를 내면서 그를 죽여 버렸다. ‘호 나라는 우리와 통혼관계를 맺은 형제 국이다. 그런 나라를 치라고 하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 호 나라 추장은 이런 사실을 전해 듣고 정 나라가 자기 나라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철석같이 믿어 군사훈련도 시키지 않은 채 무사태평하게 지냈다. 이 방심을 틈 타 정나라가 호 나라를 공격하니 쉽게 무너져 갔다. 호 나라 추장이 상식에 얽매여 대비를 하지 않은 결과이다. 상식의 배반에는 방비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그만큼 좋지 않은 일이 많을 수 있다는 자만심에 대한 경고가 호사다마(好事多魔)일 것이다. 작은 문제점일지라도 제 때 해결하지 않고 그냥 보아 넘긴다거나 좋은 일에 자만하여 조심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뒤따를 수 있다는 경고다. 흔히 무엇이든지 일이 잘 풀리고 잘 되기 때문에 어느덧 스며든 방심과 자만심이 혜안을 흐리게 하면서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요소를 소홀히 하기 쉽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성공에서 경계해야 할 일은 ‘지금까지 잘 해 왔는데’가 될 것이고, 실패에서 경계할 일은 ‘또 다시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다. 지금까지 잘 되어 왔던 것 또는 성공에서 오는 자만심이 지나쳤을 때 나의 눈이 흐려지면서 주변의 변화를 잘 못 보게 되면서 경쟁 상대에게 추월당하게 되어있다. 또한 실패하면 두려움이 먼저 다가와 나의 혜안을 흐리게 하면서 모처럼 찾아 온 기회를 못 보게 하니, 자만심과 두려움 모두가 기회를 볼 눈을 흐리게 한다는 데서 끊임없는 경계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만약 무슨 일이 나를 괴롭힌다면 이보다 더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는 점을 생각할 일이고, 모든 고통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점, 그리고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내 정신을 살찌울 수 있다는 점에서 감사해야 할 일일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때로 완성된 상태에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비뚤어지거나 타락한 상태에 있기도 하니, 바로 그 완성된 상태가 조심해야 할 경우가 더 많고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나쁜 것을 몰아 낼 필요가 있다.

 물과 세제(洗劑)가 옷에 침투하여 때를 분해하듯이 각자에게 맞는 세제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잡다한 상념들과 회한들을 깨끗이 씻어내는 세심(洗心)이 필요할 때가 많다. 마음을 씻기 위한 세제는 마음속에 묻어있는 때의 종류나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강가에 서서 눈을 감고 맑은 물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 마음을 씻어내는 데 집중하는 동안은 다른 상념들이 끼어들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후에도 한동안은 마음이 편안해지게 되어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 매어 있어 특별한 수련이나 수행을 통한 마음수련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필요할 때 자신의 방식대로 마음을 씻을 수 있다. 마음속의 더러움도 오랫동안 쌓이면 벗어나기 어려우니 쌓이기 전에 자주 씻어내는 것이 좋다. 세심도 손을 씻는 것처럼 일상화, 습관화 되면 항상 청결한 상태 또는 평온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마음속에 분노가 쌓여 있으면 일단 분노부터 털어낸 다음 마음을 씻어야 할 일이다. 분노나 심한 갈등은 물론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과 같은 것이어서, 먼저 그 얼룩을 지운 다음 마음을 씻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번 청소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방 안이 깨끗한 것이 아니듯 우리의 마음도 한 번 반성하고 좋은 뜻을 가졌다 해서 늘 그 상태로 간직되는 것은 아니다. 어제 가졌던 좋은 뜻을 오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어제의 그 좋은 뜻이 우리를 곧 떠나고 말 것이다.

 잘못되어 가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궤도를 수정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그 길을 고집하는 사람,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도 일이 잘 되어 앞으로도 늘 잘 될 것으로만 믿는 사람, 주변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해 위기를 간과해 버리는 사람, 성공했고 또 성공하고 있기 때문에 시련 따위는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그 안이한 자만심에게 발목이 잡히면서 큰 실패를 잉태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성공으로 이끈 사람들은 대부분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남다른 경쟁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일단 우리들의 마음에 자만심이 깃들고 난 후에는 자신의 마음이 뜻대로 통제되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잘 되던 것이 어느 순간 난항을 보인다면 먼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신감 아닌 자만심이 고개를 들고 있지 않은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방식을 버리고 심기일전하여 새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자존심은 나 자신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성취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어있다. 성공하면 할수록 무슨 일에 잘 되면 잘 될수록 쉽게 스며드는 자만심에 굴복당하여 지금까지 쌓아 둔 성공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초심으로 돌아가 변화하는 환경을 제대로 간파하여  또 다른 성공의 길로 나아가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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