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맹자(孟子)가 열두 살이 되자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에게 보내 학문을 높이고자 했다. 아들이 학문을 위해 떠난 뒤 어머니는 전보다 더욱 더 열심히 일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들을 보고 싶었지만 한 푼이라도 더 마련하여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베틀에 앉아 베를 짰다. 그렇게 몇 해의 세월이 흘렀다. 맹자는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해 우선 어머니를 모신 다음 학문을 계속하려 하였다. 그것이 어머니와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맹자는 스승에게 억지 승낙을 받고, 보고 싶은 어머니를 향해 한 달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운 어머니 집에 도착하자 반가움에 못 이겨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 저예요. 절 받으세요.’ ‘필요 없다’. 어머니는 조금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맹자는 어머니의 화가 난 얼굴을 처음 보았다. ‘못난 녀석. 공부도 끝마치기 전에 집에 왔단 말이냐 ? 지금 제 정신이냐 ? 대답을 좀 해 봐라 ’. ‘실은 어머니를 모시고 공부를 하는 것이....’. ‘듣기 싫다. 돌아 가 거라. 어서 ’. ‘어머니...’. 그 때였다. 어머니는 갑자기 짜던 베의 중간을 끊어버렸다. 맹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머니의 근엄한 목소리가 이내 맹자의 가슴을 울렸다. ‘잘 보았느냐 ? 짜던 베도 중간에 이렇게 끊어 버리면 아무런 쓸모가 없거늘, 하물며 인간인 네가 해야 할 공부를 중도에 그만 둔다면 장차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 ’맹자는 그 제서야 어머니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께 큰 절을 올린 다음 다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맹자의 유년시절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이후에 있었던 일이고 예로부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공부 잘 하는 사람이라면 학교에서 수석을 독점하고 졸업 후 고시 또는  입사시험이나 승진시험 등에 척척 수석으로 합격하는 머리 좋은 천재인데다 노력까지 뛰어난 우수한 인재를 생각하기 쉽지만, 중단 없는 공부 또는 평생 학습의 습관을 몸에 배게 훈련시키는 참 공부에 대한 인식에는 좀 인색한 것 같다. 우리는 또 흔히 ‘잘 사는 사람’ 이라면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건강하고 사회적 지위나 인망이 높다는 등의 요건을 생각하기 쉽지만, 참으로 잘 사는 사람이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타인에 대한 사랑이 깊어가는 사람으로 변모해 가는 사람이라야 할 일과 비슷한 같다. 
 학문에 중단이 있다면 이미 학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푸른빛이 남빛 쪽물에서 나오지만 남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나무가 먹줄의 힘을 빌려 곧게 되고 쇠붙이가 숫돌에 갈려서 날카롭게 되는 것처럼, 사람도 나날이 지식을 넓히고 자신을 반성해 가노라면 지혜는 밝아지고 행동에 과실이 없어질 것이다. 사람이 즐거움만 맹목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그 즐거움이 즐거움다움을 잃을 수 있다. 일이 있을 때 오히려 즐거움이 살아날 때가 있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열심히 즐기는 것도 중요하다. 이 두 가지가 조화로울 때 충실한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습이 몸에 배게 양육하는 방법이 있을까 ? 단답형의 명쾌한 해법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원재료에 대한 기초공사가 좋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에게서 원재료라면 유아기 이고 이때부터 언어능력을 키워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좋다. 아이가 세 살 정도 될 때 도서관이아 서점에 데리고 가서 직접 책을 고르도록 하는 것이 좋다. 또 이 때 쯤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글쓰기 연습을 이 때 시킨다는 것은 지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 시기의 책 읽기와 글쓰기는 아이의 독립심, 자신감, 자제심 등을 높이고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유아기 때부터 귀, 눈, 손을 사용하게 할 필요가 있다. 마당에 핀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 주고, 버드나무의 흐르는 것 같은 잎사귀와 단풍나무의 대칭형인 잎사귀의 차이를 알게 해야 한다. 오래 된 떡갈나무의 거칠거칠한 줄기를 만져 보거나 플라타너스의 매끈한 줄기를 만져 보게 해야 한다. 모직 양복감의 감촉이나 벨벳, 고양이 털 등의 감촉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게 해야 한다. 나무들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 소리, 이른 아침에 들려오는 물새 소리, 이른 새벽의 적막을 깨는 닭 우는 소리, 조약돌에 부딪치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 그런 간단한 것이 발판이 되어 아이들이 넓은 감각의 세계로 이끌고 그 아이의 인생을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유아기에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 감각 교육이야말로 사고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된다. 머리를 쓰게 하는 방법에는 직접 지식을 가르치는 것과 지식을 얻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있는데, 후자가 훨씬 더 유용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린이에게 무조건 지식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부모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당장의 물고기 한 마리를 주는 대신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일이다. 목표하던 상급학교에 입학하거나 입사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만으로 장래발전을 보장받기는 어렵고, 지식의 체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터득할 때 다른 일에도 적응이 될 것이고 학문에 대한 흥미도 더 해 갈 것이다. 돈을 빌려주는 것은 거절해도 좋지만 책을 빌려주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 될 일이다. 모든 배움이 흉내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흉내 내어 공부할 모델(role model)이 되어야 한다. 교육열이라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의 책상은 있어도 아버지 전용의 책상이나 책꽂이가 없는 가정이 많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무리 공부하라고 노래를 불러대도 우리 아이는 공부를 안 한다’라고 탄식하는 사람은 그 원인이 자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흉내 낼만한 아버지상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배우는 것을 중단해서는 지금까지 애써 배워 온 것을 단시간에 잃고 말 것이다. 30년 동안 배운 것을 3년 만에 다 잊어버린다는 말을 귀담아 둘 일이다. 심한 말로 들리겠지만 배우지 않는 사람은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자녀가 마음에 새기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배우는 것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배움에 있어서도 지능형 교육이 있고 창조 형 교육이 있다. 지능형 교육이란 외우는 일에 중점을 둔 방식 또는 정해진 담을 강제로 요구하는 수험형의 전형적 방식이다. 분명한 이치를 설명해 주지 않고 무조건 외어야만 좋은 점수를 받게 된다는 점에서 자유스러운 발상을 허용하지 않는 강제가 존재한다. 다음으로 창조 형 교사란 학생들에게 깨닫게 하는 교사,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교사,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는 교사를 말한다. 공부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면과 아이들의 머리를 유연하게 키운다는 두 가지 면에서 학습 능력의 무한한 잠재력을 내장시켜 주는 방식이다. 부모가 아이의 마음속에 좋은 선생님 상을 심어주는 것도 학습효과를 높이는 데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 부모가 아이에게 무리하게 강요할 때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도 유의할 일이다. 아이에게 음악을 좋아하게 하는 방법은 어릴 때부터 좋은 음악을 되풀이하여 듣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에게 피아노 연습을 시키면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며 배우게 되어 성취도를 높이기 쉬워질 것이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제 공부 좀 해라’ 라고 아이에게 말한다면 공부 좀 하려고 했던 아이의 마음이 싹 달아나 버리고 만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며, 학습효과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부모의 참견이 아닌 공부하고 싶어지는 환경조성이 먼저임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고, 일단 아이가 공부를 시작했으면 방해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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