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이 존재할 때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의사소통의 수단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에 왔다 갔다 하며 인간에게 하늘의 뜻을 전해주고 땅 위의 인간이 하늘에게 자신의 소망을 전하게 하는 심부름꾼이 있으니 그 이름이 ‘새(鳥 bird)’다. 하늘과 땅 ‘사이’에 왔다 갔다 날아다니는 심부름꾼이니 이 ‘사이’가 ‘사 +이=새’로 되었다는 말이다. 태초의 우리 조상님들이 숭배한 상상의 동물인 봉황(鳳凰)이 바로 하늘과 땅 사이의 통신수단에서 심부름꾼으로 숭배 받은 새 이름인 것이다. 또 이 ‘사이’와 같은 어근(語根)인 옛 글 ‘슷’은 ‘소리’와 동근어인 동시에 하늘의 뜻(말씀)이라는 의미에서 우린 인간에게 하늘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스승’이 되고 나아가 말‘씀’에서 보여주는 말(言 language)과 더 나아가 서구인들이 빌려 간 ‘샤먼(shaman 주술사)’이 되기도 한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야외 학습을 겸한 소풍을 갔다. 이 소풍에는 학부모가 부부동반으로 같이 참여하여 선생님의 학습활동 보조역할을 겸했다. 귀여운 딸아이가 아빠의 손을 꼭 잡고 같이 즐기던 중 딸아이가 아빠의 손을 이끌고 어느 풀(식물) 앞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이 풀이름이 뭐죠 ?’ ‘글쎄다...... ’ 생물학을 전공한 아빠가 그 풀이름을 모를 리 없지만 이렇게 답한다. ‘아빠도 무슨 풀인지 모르겠구나. 그러니 저기 선생님께 가서 여쭤보고 오렴.’ 아이는 풀을 한 포기 꺾어서 선생님에게로 달려갔다. 선생님에게 풀을 들고 갔던 아이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힘없이 돌아와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선생님도 모르시겠대요.’ ‘그래 ? 오늘은 소풍날이라 정신 없으셔서 그러신가보다. 그럼 가지고 있다가 내일 선생님에게 다시 여쭤보도록 해라.’ ‘지금 모르시는 데 내일이라고 아시겠어요 ?’ ‘그럼, 너도 알고 있는 것을 곧잘 잊어버리고 그러잖니 ?’ 아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풀을 빈 도시락에 담았다. 다음날 이 생물학자는 아이가 등교하기 전에 미리 선생님에게 아이가 물었던 풀의 이름과 특징 등을 적은 메모를 전해 두었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가슴에 길이 남을 삶의 지표를 주어 올바른 사람으로 이끄는 역할이 스승의 일이다. 아이들이 스승을 믿고 존경할 수 있어야 자신의 배움에 대한 확신이 서게 되고 장래 계획이나 역할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나아가 우리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고귀한 영혼까지 쉼 없이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너 자신을 알라’ 는 남들을 향해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칠 소리가 아닌, 소리 없이 자신을 향해 강렬하게 외치는 내면의 소리이니, ‘네 분수를 알아라, 네 죽을 곳을 알라’의 외침인 것이다. 일상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아닌 진실한 ‘자기’에게 눈을 뜨라는 말이다. 자신을 의문의 대상으로 몰고 간 다음 논변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올바른 판단으로 이끌어나가는 내성을 명하는 소리인 것이다. 이렇게 외친 지혜를 사랑하는 주인공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청년들에게 정의, 절제, 용기, 경건 등을 가르쳐 큰 감화를 주었지만, ‘청소년들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제신(諸神)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목으로 고소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교양이니 지혜니 하는 것은 좀 없어도 괜찮다. 지금은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이니 부자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낫다’라고 한다면 ‘돼지로 태어나서 편안하기 보다는 차라리 사람으로 태어나서 슬퍼하라’는 그의 외침은 귓등으로 흘러가고 말 것이다. 사랑하는 스승이 겪었던 부당하고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부정의가 자리 잡을 수 없는 국가관에 도달하기 위한 필생의 노력을 기울인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에 이르러 스승의 사상은 더욱 꽃피면서 불멸의 가르침으로 전 인류에게 다가와 있다. 그가 말한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볼 때 그 개인의 정욕이 농. 공. 상업에 종사하는 서민이며, 기개(氣槪)의 부분은 군인과 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이고, 반드시 선의 이데아(idea) 인식을 전제해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니 공자님의 천명사상과 상통하는 것 같다.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불행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방황하는 것이다. 만년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소망이지만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는 유일한 길이 젊을 때에 고생을 해 두는 일임을 알면서도 잊기 쉽다. 남에게서 질문을 받았을 때 아는 것을 안다고 대답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대답할 일이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대답했다가 실제 그의 무지가 드러나 곤욕을 치루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많은 것을 알아갈 수록 자기가 아는 지식세계가 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며 또 우리 인간이 탐구할 지식세계가 무한히 널려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깊이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잘 알지 못한다는 모순된 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또 무지를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 엉터리 지식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어떤 전문적인 문제에 대하여 무지하다고 하여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묻거나 책을 통하여 배우면 될 일이지만, 엉터리 지식이나 잘못된 지식이었을 때 이를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원초적 자기보호 본능인 이기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교양을 갖추어야 하며, 자기완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인생행로를 잡아갈 때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존재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정신적인 존재란 박애(博愛)가 그 바탕임을 말해준다. 이기심은 모든 생물이 가진 자기보존의 욕망에서 우러나지만 우리 인생의 목적과는 반대방향임을 잊기 쉽다. 인간에게 필요한 교양이란 사랑할 줄 아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위하여 자신의 본래 욕구를 억제하면서 사회의 욕구와 타협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더라도 사회와의 적응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자신의 본래욕구, 감정, 목표까지 잃게 되는 과잉적응에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지위도 오르고 수입도 늘어나서 자리가 잡히면 모든 것이 좋은 상태로 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다 어느 사이에 상승세가 꺾이면서 제자리걸음으로 들어가거나 하향세를 맞이하면서 늘 상승의 환상에만 익숙하게 젖어있던 사람도 상승정지 증후군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상승정지 증후군은 특정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맞아야 할 필수과정 이니 그럴수록 냉철하게 새로운 보람을 찾아 인생 계획을 재편성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삶에 무리하게 매달릴 생각을 버리고 큰 전망에서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내적인 방향전환이 제대로 될 때 그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참으로 자신에게 맞는 땅에 발을 붙인 원숙한 인생, 여유 있고 풍요한 인생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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