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부(富)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부유해져서는 사회 또는 공동체에 해가 될 뿐이다. 가난하여 원망 없기도 어렵고 부자가 되어 교만 없기도 어렵다. 재물이란 늘 오물(汚物)과 같으니, 이를 쌓아둘 때 악취가 나지만, 이를 뿌릴 때 땅이 비옥해진다. 부귀하면 생판 모르는 사람들도 모여들고 빈천하면 가까운 친척마저 멀어질 뿐 아니라 가족마저 해체될 수도 있다. 돈이 공격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요새는 없다는 말도 있다. 사실 돈 만큼 웅변적인 것은 없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도 나에게 잘 보이려는 데서가 아니라 내 손에 쥐고 있는 빵 때문이다. 그래도 돈을 신처럼 숭배할 때 그 돈이 우리를 악마처럼 괴롭힐 것이다. 돈은 아주 좋은 하인이기도 하지만 아주 나쁜 주인이기도 하다. 그러니 돈은 지독한 주인이지만 멋진 종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돈이 있으면 걱정이고 없으면 슬퍼진다. 그러니 우리에게 돈이 있을 때 공포 속에 있고 돈이 없을 때 위험 속에 있을 때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많이 가지고 가난한 사람처럼 살고 싶어질 것이다.

 누구에게나 돈은 필요하지만 매 끼 끼니를 걱정해야 할 사람에게는 땡전 한 푼이 생명과 직결되니 절실히 필요할 것이지만, 인간으로서 최고의 권좌에 있는 왕 보다 위에 올라 마음대로 나라를 주무를 수 있는 극상의 부귀를 누리면서도 땡전 한 푼이라도 더 긁어모으려고 거의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다. 사가들의 평가가 아니더라도 일반상식으로 우리는 흔히 많은 대원군의 개혁 중 다른 모든 그의 업적에 매우 높은 점수를 주면서도 옥 의 티로 쇄국정책과 경복궁 중건을 머리에 새겨놓고 있다. 아들(고종)이 왕이 되기 전 파락호를 자처하면 실없는 짓만 골라가면서 반 쯤 머리가 돈 인간쓰레기로 축생 같은 경멸 속에서야 왕족 혈통이라곤 닥치는 대로 역모에 몰려 죽는 가운데 겨우 목숨을 부지해 왔던 대원군이다. 세도가들을 찾아 가 돈도 뜯어내고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술 마시고 돈이 떨어질 때 사기 도박판에 끼어들면서, 해어진 도포에다 떨어진 갓, 자그마하고 볼품없는 체격 등 어딜 봐도 싹수없는 상 건달로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그가 아들 고종의 섭정으로 10여 년간의 권좌에 있으면서 맨 먼저 한 일은, 입만 열면 문자만 늘어놓고 유식한 체 하는 문신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무인과 군사들의 대우를 문신과 같게 하고 군영의 대장을 무신이 맡게 하는 등 그들의 체신을 한껏 높여 주었다.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자마자 안동김씨 일문들이 모두 밀려나고 그들 밑에서 지방 수령으로 재물을 긁어모으던 지방 수령들도 된서리를 맞았지만 김 씨들을 처형하지는 않았다. 1866년에 대원군은 평안도에서 정기 과거시험인 도과를 실시하도록 했고, 조선 개국이라 처음 있는 서북 면 출신 인물인 평양인 선우 업을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임명했다. 또 개성 출신이자 고려 왕손인 왕 정양을 병조참의로 등용하는 등 지역차별을 타파했다. 양민이 군역을 면하는 대가로 납부하던 호포제를 양반에게도 부과하여 국고 수입을 늘리고 마을마다 사창(주민 자치제 쌀 창고)을 설치하면서 환곡제도의 문제점들을 해소해 나갔다. 또 사치를 막고 절약을 장려하는 정책을 꾸준히 펴 나갔으니,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치풍조가 만연함에 대한 제동인 것이다. 이러한 사치 금지령에는 의복의 사치제한 뿐만 아니라 갓의 크기와 도포 소매의 폭, 담뱃대의 길이까지 규제했다. 또 꼭 필요한 소의 도축을 금하고 서양의 수입품목인 옥양목의 수임을 금하고 판매를 단속했다. 원래 서원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제향하고 유생의 교육을 담당한 사설 교육기관인데, 조정의 지원까지 있고 보니 마구 서원을 세우게 되면서, 서원에 딸린 토지는 면세였고 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병역이 면제되었으며 유생들은 어느 서원이고 등을 대고 있어야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으니 그 폐해가 보통이 아니었다. 당초의 훌륭한 교육기관이 점차 파벌 화 되어 당파 싸움의 온상이 되고 부패의 온상으로 개악해 간 것이다. 이에 대원군은 전국에 47개를 남기고 900 여 개의 서원을 헐어버린 대 개혁을 실시하였다. 경복궁 중건은 그에게 큰 실책이라는 단순논리를 갖다 붙이기 십상이지만 대원군의 입장에서 볼 때 그 기본정신마저 탓하기에는 이해가 부족하거나 좀 속 좁은 감이 들기도 한다. 원래의 정전인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타버린 다음 왕들이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타 버린 지 300년이 되도록 방치되어 잡초가 우거지고 송충이가 우글거리는 가운데, 밤이면 살쾡이들이 나와 놀고 호랑이나 여우도 같이 놀았고, 무너진 담장에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등 대궐 정전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역대 왕들이 경복궁 중건을 생각했으나 자금조달의 난점으로 미루어 오던 일이었다. 이 역대의 숙원사업을 과감히 밀어붙인 그에게 왕실의 체통이나 위엄을 세우겠다는 명분은 백번 옳았으나 조정의 재정 형편으로는 매우 무리한 사업이었다. 그 자금이 순전히 기부금 또는 편법으로 조달해야 하니 800만 냥(당시 쌀 250만석 가치)을 조달하기에는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준비 과정에서 공사장에 두 번이나 불이 나서 쌓아 둔 목재가 재로 변하자, 대원군은 이를 벌충하기 위해 원납전 징수를 강행하고 당백전을 발행하여 양반과 양민 모두에게서 원성을 사기에 이르렀다. 이전의 모든 개혁 정책에서 인기 절정에 있던 대원군이 이처럼 경복궁 중건과 더불어 서양의 침략에 대비한 군비확충 의도로 시행한 온갖 잡 세 신설과 원납전 징수가 그의 인기를 한 순간에 끌어내리게 되었다. 원납전이란 자진해서 내는 의연금이지만 누구도 마음내켜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대원군은 원납전을 많이 내는 양반이나 부호에게 명예직인 벼슬을 내려 달래기도 했다.

 이렇게 잡 세들을 신설하고 원납전을 강요하여 마련한 재원으로 경복궁 공사는 진행되었으나 그래도 재원이 부족했다. 이에 무리하게 당백전(當百錢) 주조라는 무리한 화폐정책을 들고 나왔으니, 이 당백전이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 100배의 액면가를 지닌 돈으로 이 당백전은 금 본위 화폐와 같은 실질 가치는 없고, 조정에서는 원재료인 쇠 값과 주조비만 빼면 막대한 돈이 한꺼번에 국고로 들어오니 조정에 있던 구리와 쇠붙이만으로는 부족해서 전국에 징발령을 내리는 등 수선을 피워가며 주조하여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이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 시중에 나돌자 물가가 뛰기 시작했고, 상인들은 당백전을 불신하여 상평통보와의 교환을 기피했으며, 상평통보를 창고에 보관하거나 독에 담아 땅을 파고 묻었다. 이렇게 되자 돈의 유통이 줄어들고 물물교환 현상이 되살아났다. 돈 많은 부호들이나 상인들은 어음을 사용했으니 당백전을 쓸 일이 없었고, 가난한 농민들은 액수가 너무 커서 쓰기가 불편했다. 유통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판에 위조 당백전이 유통되기 시작했는데 위폐와 정품의 구별이 쉽지 않았다. 위폐범이 잡히면 사형이었으나 워낙 많이 남는 일이니 목숨을 걸고 위폐를 만들었다. 당백전의 가치는 점점 떨어졌고 당백전 기피현상도 두드러졌다. 발행 6개월 만에 통용 중지가 발표되자 당백전을 다량으로 가지고 있던 상인들은 모두 파산했고 빚 독촉에 자살하는 사람도 속출했다. 화폐제도를 이용한 경제 질서 확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가치 없는 ‘당(백)전’이 ‘땅전’, ‘땡전’이 되어 지금은 버젓한 표준말이 되어 화폐로의 유통이 아닌 말(言)로만 쓰여 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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