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와 나라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은 왜군에 쫓겨 백성과 한양을 버리고 평안북도 의주로 도망을 쳤고 이승만은 6.25때 북한군이 겁이 나서 국민을 속이고 서울을 버리며 대전으로 도망을 쳤다.

남 덕 현
전 초등학교장
 필자는 산책을 하기 위해서 남산공원을 자주 찾는 편이다. 남산을 찾을 때는 반드시 충혼탑 앞을 지나고 그리고 충혼탑 앞을 지날 때마다 새로이 설치한 충혼탑을 바라보며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한민족의 비극적 전쟁인 6.25를 떠올린다. 충혼탑의 숭숭 뚫린 모습과 어두운 황갈색은 마치 총탄의 흔적과 녹 슬은 철모를 연상케 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상처를 상기 시킨다. 잠시 눈을 감으면 전장의 포탄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조국을 위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린 이들의 국가관은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것이리라.
 정부가 국민의 행복과 평안을 보장해줄 때 국민의 국가관은 더욱 확립되며 그러지 못할 때는 국가관이 상실된다. 이런 이유에 관계없이 사회적환경과 교육적 환경의 결핍으로 국가관이 상실되는 국민도 있지만  우린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제대로 된 우리나라의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국가관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 또는 국가에 대한 가치관이나 태도.’이지만 실제적 의미는 개인이 하나의 국가에 소속되어있다는 인정 감이며 소속의 욕구이다. 자신이 소속되어있는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행복을 보장 받을 때만이 국가관은 상승되며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국가관은 점점 상실된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 해줄 것이라고 믿을 때 국민들은 합리적 준법정신과 공익을 우선시하게 되며 그것을 토대로 민족의식과 시민의식은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관의 확립을 위해서 정부가 국민을 절대적으로 보호해주는 역할과 신뢰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정치가들은 자각해야 한다.
국가관은 국가를 지탱하고 유지하는데 그 이상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이며  국가가 위태로울 때 국민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려가며 국가를 지키려 하는 것은 국가관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살펴보면 정권을 잡은 위정자들의 농간으로 국민들은 정부를 믿지 못하게 되어 국가관은 점점 상실되어가고 있다. 기회만 된다면 국가관의 확립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더욱 중요시하는 배타적 국가관으로 변질되어지고 있다. 매우 위태로운 일이다. 국가가 필요해서 개인을 부를 때도 매우 소극적이며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국가관이 상실된 사람들의 공동체는 마치 모래로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국가의 존재를 매우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붕괴되는 위험도 있다. 어찌 보면 세계화라는 구호아래 국민의 의식 속에 국가관이 완전히 사라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정부가 국민을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한 이유 때문에 국가관이 상실되어가는 과정을 역사적 배경과 현충일을 비교하여 시사 신문 독자들과 함께 담론을 나누고자 한다. 유월유일은 현충일이다.

 1950년 6월 25일, 국가관이 확실했던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들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 그것은 6.25 노랫말에도 잘 나타내고 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 내리 이 나라 이 겨레.
 또한 현충일 노랫말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겨레와 나라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님 들은 불변하는 민족혼의 상징. 날이 갈수록 아-아 그 충성 새로워라.”
 대한민국의 현충일은 더할 나위 없이 가슴 아픈 날이다. 반인륜적 이념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동족의 가슴에 총 뿌리를 겨눴던 김일성과 그 하수인들의 만행이 빚어낸 날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을 말살하려는 공산집단의 폭력에 대항하다가 목숨을 바친 분들의 넋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1년부터 추도식을 거행해오다가, 1956년 4월 19일에는 대통령령 제1145호로 6월 6일을 현충일로 정했다. 그리고 매년 전국적으로 추모행사를 거행해오고 있다. 한국전쟁 휴전 3년 후에 현충일을 제정한 것이다.
 제1회 현충일 행사는 1956년 6월 6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정부각료, 외국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약 30분간 엄숙히 개최됐다. 행사는 국민의례,  헌화, 3발의 조포 발사 순으로 진행됐다. 6.25 전쟁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육신과 영혼은 조국의 산하에 떠돌고 있는데 그런 모습은 ‘비목’이라는 가곡에 매우 잘 표현되어있다. 시사 신문 독자들은 이번 기회에 한번 마음속으로 읊조려봤으면 한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녁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이렇게 우리의 젊은이들은 국가관이 투철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정신은 우리나라를 유지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지만 위정자들과 정치 모략꾼들은 국가관을 헌 신짝처럼 버리는 일을 예사로 저질렀다.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고 국민과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들을 영웅시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은 진정으로 우리나라의 장래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럼 조선말기의 선조임금과 제헌정부 때 이승만의 처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592년 6월 22일은 선조임금이 왜군에 쫓겨서 도성인 한양을 버리고 평안북도 의주(義州)로 도망간 날이다. 이것을 선조 임금의 몽진(蒙塵) 이라고도 한다. 대장 신립이 충주에서 왜군에게 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임금은 바로 도망할 생각을 하는데, 그 때의 분위기는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자 기사에 잘 나와 있다. ‘영중추부사 김귀영(金貴榮)이 아뢰기를,
 “종묘와 원릉(園陵)이 모두 이곳에 계시는데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경성(京城)을 고수하여 외부의 원군(援軍)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우승지 신잡(申磼)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엔 80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버리고 한양을 떠나 평양에서 한 달 이상 머물다가 전세가 계속 불리해지고 평양성의 인심이 흉흉 하자 다시 길을 떠나는데, 목적지는 의주가 아니고 중국이었다. 선조실록 6월 기사에 의하면 명나라 요동 도사에게 중국으로 건너가겠다는 공문을 띄우게 된다.
 한 나라의 임금이 반정으로 실각한 것도 아니고 외적이 침입한다 하여 외국으로 도주할 생각을 한 것이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순신이 해전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연전연승을 거두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세가 다소 호전될 즈음, 선조 임금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순신을 체포 압송하고 호남의 의병장 김덕령을 잡아 죽인 것이다. 주적을 동족으로 규정하는 자는 이미 동족이 아닌 이민족이다. 우리가 싸울 적은 우리 민족을 침략하고 수탈하는 외세이지 동족은 아니다. 국토의식은 곧 주인의식이요, 주권행사이다. 내가 곧 내 나라의 주인이라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주인은 나라를 버리고 가지 못한다는 정신이다. 죽어도 내 국토 안에서 죽어야 한다는, 나와 국토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정신이다.
 이런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국가관이다. 애국이란 내 국토를 사랑하는 것부터 애국의 시작인 것이다. 제 몸을 아껴서 국토를 떠난다고 하면, 그것은 벌써 나라 사랑에서 벗어난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이 아닌 것이다. 국가관이 상실된 것이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알아보자.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하여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과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도망을 갔고 그곳에서 국민을 속이는 방송을 하게 된다. “우리 국군이 북한군을 격퇴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38선을 넘어 해주를 향해 진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북한군의 전투기는 서울시 상공을 휘젓고 다니고 있고, 대포 소리가 외곽으로부터 점점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고 서울시민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이런 와중에 1950년 6월 27일 밤 9시, 중앙방송(KBS)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울려 퍼진다. 생중계였다.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한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국군은 계속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돼가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십시오.”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방송한 장소는 서울이 아니라 대전이었다. 국민을 향한 대 사기극 방송이었다. “내가 발표한 것을 녹음해서 서울에서  여러 번 재방송하라.” “누가 묻더라도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국민은 이승만 대통령이 중앙청에서 방송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눈 뜨고 보니 서울이 온통 북한군의 소굴이 된 것이다. 늦게나마 남쪽으로 발길을 이어갔던 사람들, 이 사람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방송 후 몇 시간 뒤인 6월28일 새벽 2시, 북새통을 이루던 한강다리가 폭파됐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다리를 건너고 있던 800여 시민과 장병들을 비명에 보내버린 원흉은 이승만이었다.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한 거라고는 하나 이 순간까지도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을 속여도 되고 죽여도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더 분노할 사안은, 국민으로 하여금 피난을 지연시켜서 더 많은 희생자를 유발했고, 서울시민을 공산치하에 넘기도록 원인 제공을 한 1950년 6월27 일 사기방송에 대해 정부 차원의 사과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현충탑에 누우신 영령들이여! 조국을 위해 몸 바친 대한의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을 모신 현충탑 앞을 지날 때마다 고마움에 고개를 숙인다. “ 한 나라의 임금이 그리고 일국의 대통령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 국민과 나라를 버리고 도망을 쳤다는 사실,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인가? 그러나 의병과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것이다. 정부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깊이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충일은 뜻 깊은 날이다.

*필자 남 덕 현은 1949년 고성읍 동외리 정동(솟골)에서 출생하여 고성 초. 중학교 및 통영고와 진주교육대학교를 거쳐 초등학교장으로 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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