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덕 현
전 초등학교장
 이제 가을이다. 날씨가 선선해지고 단풍과 추수의 계절이 다가왔다. 우리들의 삶을 뒤돌아보고 우리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어디쯤 와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 인간 중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우리들의 삶의 방향에 대해 독자들과 사색의 심연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기독교의 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에게 인간 최고의 지식과  지혜를 선물한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을 주리니 너의 후에도 이 같음이 없으리라.” (참조: 구약성경 .역대 하)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일생동안 부와 권세를 누리나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40년 후에 그 조상의 땅에 묻히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갔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참조: 구약성경. 전도서) 솔로몬은 인생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한다. 필자는 솔로몬이 했던 인생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을 보면서 그 말에 대해 실감한다. 수천 년 전에 한 이스라엘 왕이 했던 고민이나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누구나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은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세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개인은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한 왕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보자. 그것이 지금 시대에 큰 의미가 있는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냥 한 역사일 뿐이다. 지나가면 무의미하다. 어차피 누군가 지거나 이길 전쟁이었다. 이 글을 통해 솔로몬의 탄식을 들어보고 헛된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음으로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참조: 구약성경 .전도서)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 있게 말하였다. 보라. 나는,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어떤 왕보다도 위대하다. 그 누가 나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욱 열심히 지혜를 쌓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바람을 잡듯 허망한 일이었다. 지혜가 많으면 괴로움도 많으며,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곧 근심을 쌓는 일이었다. 필자는 갑자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 한 구절을 떠올려 보았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 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 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葬事: 사람이 죽었을 때 지내는 장례 절차)를 위하여 함이니라.
 (참조: 신약성경. 마태복음 26장) 예수가 죽음이 임박하실 때, 한 여인이 찾아와 값비싼 향유를 예수께 부었던 여인에게 한 제자가 나무랐었다. '차라리 저걸 팔아서 가난한 자들한테 주는 게 나을텐데!'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하는 것 아니냐. 이것은 내 죽음을 위한 것이니 더 가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일까? 몇 명의 사람에게 돈을 조금 쥐어주어도 그 사람들이 다 죽고 나면 어차피 세상은 그대로이다. 크게 달라지는 것이 있는 것일까?

 솔로몬은 세상만사가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점에서 크게 회의감을 느꼈다. 어차피 세상은 매번 그게 그것,  돌고 도는 것이다. 그 이후에 솔로몬은 지혜를 탐구한다. 그러나 지혜가 그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했다. 실컷 지혜를 쌓아봐야 세상의 부조리함만 드러날 뿐이다. 세상 섭리를 다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며,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고, 고민만 늘어난다. 단순하고 바보 같은 삶이 차라리 낫다. 많은 것을 알려고 했더니 머리만 복잡해지고, 삶은 더욱 무의미해보였다. 그 후에 솔로몬은 쾌락을 탐구한다. 또 재물을 탐한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내가 애써 구했던 그 모든 것은 바람을 잡는 것처럼 다 헛된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귀중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왜? 이유는 단순하다. 지혜가 있어봐야 죽으면 모든 것이 헛일이다. 인생의 앞에는 언제나 최종 목적지인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 그 앞에서 모든 것은 의미 없다. 죽으면 모두 잊혀지고, 모두 사라진다. 영원한 것은 없다. “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참조: 구약성경. 전도서 2장) '나는 사는 게 싫어졌다. 이 땅에서 하는 일이 다 괴로울 따름이니 모든 것이 너무나 속절없고, 바람을 잡듯 허무해보일 뿐이다.' 라고 탄식한다. 솔로몬은 왜 인생을 단순하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 이후에 솔로몬은 인생의 깨달은 결론에 도달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줄을 또한 알았도다.“(참조: 구약성경. 전도서 3장)  '결국 나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고,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는 의미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처음과 끝)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참조: 구약성경 전도서. 3장) 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정하신 알맞은 시기가 있다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러한 시기가 언제 펼쳐질지 매우 궁금해 하는 속성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를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드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마음을 주셨지만,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여 어떻게 일을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솔로몬은 깨달았다는 것이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를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뽐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참조: 구약성경 전도서 3장)
 솔로몬은 크게 두 가지 '시기' 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좋은 시기'와 '나쁜 시기'이다. 이 모든 때라는 것은 결국 사람의 자연이 돌아가는 섭리라기보다는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모든 일들을 포괄하고 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참조: 구약성경. 전도서 7장)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시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긍정적인 일, 부정적인 일 모두 하나님의 뜻 아래 존재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솔로몬은 왜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전도서 전반적으로 흐르는 매우 깊은 뜻이 있다. 솔로몬의 핵심적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솔로몬은 왜 이러한 사실을 강조 하는가? 그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오직 종교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 때문에 종교적인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오직 그 믿음이 당신에게 가져다 줄 유익에 의존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목적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그 차이를 표현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남한은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북한보다 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말이다. 성경 어디서 그런 사실을 가르치는가? 경제적인 부와 신앙이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어느 성경이 그런 부분을 가르치는가?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이다. 기독교는 이런 가르침을 어서 포기해야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능히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고, 그분의 시기에 대해서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시기와 때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그분의 때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예기치 못하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솔로몬에게 깊은 허무감을 주었다.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솔로몬은 죽음의 의미와 인생관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그는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을까?

 신앙은 수단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나는 제발 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을 어서 속히 포기하기를 바란다. 정말 간절하게 바란다. 신앙을 왜 수단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은혜를 받기 위한 행위가 되어서도 안 된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행위가 될 때 그 의미가 있다. 헌금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몇 배로 돈을 불려주실 것을 기대하고 헌금하는 것은 헌금의 의미를 매우 심각하게 퇴색시키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투자대상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분으로부터 이미 받은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드려야하는 것을 더 큰 것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인가. 인생을 단순하게 여기고 즐거워할 줄 아는 것이 좋다. 어차피 인생은 고달픈 상황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와중에서 즐거움과 행복감을 누리는 것 좋은 일이다. 인생을 심각하게만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로 알고 누릴 줄 아는 것이 좋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전도서의 가장 큰 핵심이다. 전도서에서 나오는 단어 중에 가장 눈여겨 보아야하는 표현은 '헛되다' 가 아니라, 바로 '분복', 그리고 '낙을 누린다.' 라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 '분복'이라는 단어의 특징은 '수고'라는 단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등장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참조: 구약성경. 전도서5장) 그러므로 얼마나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가가 더 중요하다. 또한, 그것을 누릴 줄 아느냐가 중요하다.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른다면 어느 때든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 뿐 만 아니냐?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참조: 구약성경. 전도서 5장) 삶 속에서 느끼는 사소한 소중함,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 맛난 음식을 먹을 때 의 쾌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중한 감정, 이러한 사소한 것들이 인생의 다른 한 측면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누릴 줄 모른다면 인생은 매우 무가치하고 어두울 것이다. 너무 꿈을 크게 가질 필요는 없다. 인생은 어찌 보면 다 고만고만하다. 이 사회는 경쟁을 부추기고, 다른 사람보다 유명해지거나 더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들을 찬양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실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만족할 줄 아는가?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가? 삶의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느낄 줄 아는가? 삶을 너무나 심각하게만 받아들이지는 않는가? 인생을 너무나 대단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꼭 대단한 위인이 될 필요도 없다. 유명인사가 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반대로 경쟁을 포기해 버리는 자세로 돌아올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 일을 즐거워하는 것' 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리고 언제나 '수고하고 애쓰는 것'과 '낙을 누리는 것'이 병행되어 나온다. 무엇이냐 하면 성실성에 대한 것이다. 수고하고 노력하고 애쓰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 이 둘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즐거움만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다. 즐거움은 수고로운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 주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함으로서 놀라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허무주의나 쾌락주의 어떤 극단으로도 치닫지 않는다.. 단순히 소박하고 순수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단순한 삶의 진리에 대하여 매우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삶은 불확실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러한 불확실성과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인간의 노력은 헛되다. 그러나 노력하고 수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삶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것이 좋은 일이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이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참조: 구약성경 전도서 9장) 인간의 삶이란 결국에는 인간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밖에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죽음이란 한곳으로 간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잘 믿어서 하나님의 뜻을 잘 파악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시도는 모두 헛되고 무익한 일이라는 점이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향유할 수 있는 한 누리라고 충고한다.' 내게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삶을 즐기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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