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신라 진흥왕 때에 이르러 가야를 합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다. 호족 숙흘종의 딸 만명(萬明)이 이름도 성도 모르는 젊은이와 사랑에 빠져있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다. 아버지 숙흘종은 딸을 불러 엄히 문책했다. ‘혼인도 치르지 않은 처녀가 이 무슨 흉측한 소문이야? 말해라. 그놈이 어떤 놈이야?’  만명은 머리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난 숙흘종은 만명을 곧장 광에 가두어버렸다. 그날 밤 하늘에서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우레 소리와 함께 만명이 갇힌 광으로 번개가 내리쳤다. 그 바람에 광을 지키던 하인들은 졸지에 번개에 맞아 죽고 만명은 광 창문을 넘어 정인인 젊은이와 함께 멀리 진주 땅으로 달아나 혼인식을 치렀다. 그러자 숙흘종은 어쩔 수 없이 젊은이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가 가야의 왕손 김서현이다. 만명은 혼인을 한 다음에도 처녀 때와 다름없어 언제나 겸손하고 매사에 후덕함으로 대하자 모든 사람들이 만명을 존경하였다.
 이듬 해 만명부인이 친정에 잠시 다니러가게 되었는 데 원래 검소하여 호사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가마도 마다하고 젖먹이 어린 딸을 건사할 계집종 한 명만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딸아이를 등에 업은 계집종과 함께 말벗도 해가면서 만명부인이 산 중턱에 이르렀을 무렵 산길 한 쪽에 쓰러져 신음하는 늙은 걸인을 보게 되었다. 만명부인은 급히 그를 부축하여 대충 몸의 상태를 살폈더니 허기에 지친데다 탈진한 상태라 당장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만명부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저고리를 풀어헤치고 잔뜩 부푼 젖가슴을 꺼내의 늙은 걸인의 입에 물렸다.  미동도 않던 걸인이 젖가슴의 온기를 느끼자 정신없이 젖꼭지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놀란 계집종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돌리고 섰는데 만명부인은 부끄러운 기색도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늙은 걸인이 젖을 더 잘 빨 수 있도록 걸인의 목덜미를 두 손으로 받쳐 주었다. 한 참 후 늙은 걸인이 의식을 회복하자 만명부인은 손수 노인을 부축하여 마을에 데리고 가 주막집에다 셈을 치르고 따로 주모를 불러 수고비를 얹어주며 걸인이 회복할 때끼지 몸조리를 부탁하고는 다시 친정으로 향했다. 주막집에서 건강을 회복한 늙은 걸인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을 사방으로 찾았으나 그 신원을 아는 이가 없었다. 늙은 걸인은 신라 전역의 사찰을 찾아 다니며 생명의 은인을 위한 불공을 드렸다. 그 만명부인은 후일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른 김유신의 어머니였다.

 인생살이에 있어서 이미 끝나버린 일에 대하여 후회하기 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한 일에 더 큰 후회가 남게 된다. 인간은 실패 때문에 소중하고 큰 것을 잃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잃은 것 못지않은 값진 교훈도 얻게 된다. 하지만 하고 싶었던 일을 놓칠 때에는 교훈 같은 것을 얻을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실패는 곧 성공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데 유익하지만 일 그 자체에 힘쓰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성의 토양 모두를 잃게 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싫은 일이 라면 자신도 남에게 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용서(容恕)의 ‘서(恕)’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마음으로 ‘인(仁)’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도 남도 같은 인간이라는 전제로 연대감을 표시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린다는 점에서는 ‘서’와 ‘인’이 공통되지만 ‘인’의 폭이 훨씬 넓다는 차이는 있다. 이 ‘서(恕)’와 ‘인(仁)’이 아니고는 위의 만명부인 이야기는 오늘까지 전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어질 ‘인(仁)’ 하늘과 땅을 품을만한 어질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아무리 어질더라도 유의할 점은 있다. 먼저 ‘인’의 과잉이다. 이쪽저쪽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하다보면 진퇴양난에 빠지기 쉽다는 ‘인’의 역효과에 빠져서는 안 될 일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중요도에 대한 기준이 흐려져 가치 없는 일을 ‘인’으로 오인하는 일이다. ‘인’에 못지않게 중요한 행동지침이 ‘의로움’이다. 이(利)를 만나면 의(義)를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더라도 ‘이(利)’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될 일이고 사실상 바로 그 이(利)를 추구하는 그 욕망이 우리 인간의 삶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다만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하면 ‘이득(利)’ 쪽으로만 달려가기 쉬우므로 ‘의(義)’가 사라지게 되면서 인간사회가 질서 없는 난장판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정신상태 근저에는 기회, 본능, 강제, 습관, 이성, 정열, 희망 등이 작동하여 어떤 행동으로 이끌게 된다. 이성과 철학의 힘으로 확고부동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을 때 우리의 판단은 남의 칭찬과 비난에 쉽게 동요되어 중심을 잃기가 쉽다. 행동이란 늘 그 자체가 고결하고 의로워야 할 뿐만 아니라 행동의 밑받침 되는 원리 또한 확고 불변하여 먼저 마음을 굳게 정하고 나서 신념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다. 옳은 것을 깨우치거나 배우기보다는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이 더 낫다. 이지(理智)를 가지고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을 때 자유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미덕중에서도 으뜸가는 미덕이 겸허이지만, 그 겸허가 악과 허위에 대한 겸허라면 인간의 부패와 타락이라는 가장 옳지 못한 단계임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두려움 또는 의무감에서가 아닌 자신의 판단에 따른 행동으로 살아갈 때 즐거운 인생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신념을 가질 때 자유와 에너지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인생의 목적을 정신의 완성에 두고 있는 인간에게 불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은 전부 그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외면 세계의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맹수들이 장애에 부딪치면 한 층 더 사나워진다. 굳센 정신을 가지고 모든 일을 겪어나가는 사람에게 일체의 장애는 도리어 강한 힘을 더해 줄 뿐이다. 정신의 평화와 만족감, 즐거움이 충만할 때 행복이 찾아온다. 장애물이 없으면 물은 흐른다. 둑이 있으면 물은 고인다.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꼴이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된다. 그 무엇보다 가장 강한 물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인간이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모든 일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생의 가치 있는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에 이끌려 나아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장애물을 만나도 슬기롭게 대처할 능력 말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뒤에 그 배에 구멍이 있는지 없는지 점검한다면 이미 때늦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자신의 결점은 쉽게 고치지 못하더라도 자기향상을 위한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할 일이다.
 사람의 행동에 있어서 늘 거기에는 스스로인가 시켜서인가를 생각하게 되지만 거기에는 늘 ‘스스로’ 이면서도 참된 가치와 보람으로 가득 찬 즐거움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은 평생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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