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이태원 일원에서 발생한 ‘핼러윈 사태‘는 무려 156명이라는 생떼 같은 목숨들이 눈꽃처럼 스러졌다. 희생자도 대부분 10대, 20대로 갓 피어나려는 꽃봉오리들이다. 당시 뉴스 보도를 통한 많은 국민들은 반신반의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후진국에서나 일어날법한 그것도 선진 대한민국이란 곳에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3년 동안 막혀 있던 물꼬가 터지는 바람에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지역은 이태원으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핼러윈데이 행사가 진행됐다. 외국인들이 괴상망측한 가면을 쓰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을 당시 한국인들은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그들 특유의 문화쯤으로 치부했을 뿐 몰입할 대상으론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2천 년대 들어서면서 ‘글로벌’이라는 대명제 아래 이태원 핼러윈에 한국 젊은 층이 대거 등장했다. 

 문제는 이들이 핼러윈 문화를 제대로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런 반열에 끼지 못하면 마치 글로벌에서 낙오되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핼러윈데이에 이태원에 가는 것이 그들에겐 선진시민의식으로 치부됐다.

 우리 사회 일부가 이런 지경에 처한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길거리 상점 간판에 우리말이 들어 있으면 창피하다고 할 정도다. 도대체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외래어가 사용돼야 글로벌이고, 국제화라고 하니 이게 어디 말이 될 법인가 한가 말이다. 

 특히 외래어를 써야 만이 소위 말하는 세계화 정신에 맞는다고 한다. 그래야 외국에서 인정받고 한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고들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까지 왔는지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반성해야 한다. 

 이런 세태의 류를 조성한건 지식층이고, 정치인이고, 경제인들이다. 그들이 앞장서 말끝마다 외래어를 섞어대고 해외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거치지 않은 젊은이들을 푼수 취급했으니 10대, 20대들이 기를 쓰고 이태원 핼러윈 행사에 참가하려 했던 것이다.

 참사소식을 전하면서 핼러윈데이 행사에 인파가 운집했다는 뉴스는 서울 이태원과 일본 도쿄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많은걸 의미하게 한다.

 하필이면 해밀턴호텔옆 폭 4m밖에 안되는 45m짜리 경사진 골목길에 인파가 몰려 도미노처럼 넘어진 바람에 대형 참사로 번졌지만 일본은 광장이었다. 사고가 날 턱이 없는 탁 트인 장소였다. 아마 내년부터는 그 좁은 골목을 통행금지 시키고, 전철을 그냥 통과시켜버리거나 경찰을 쫙 배치해 인원을 통제하면 다시는 사고로 번지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이번 참사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로선 몇 가지 교훈을 새겨야 할 것이다. 첫번째는 세계적으로 한국의 품격을 깎아먹는 사고였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함이다. 이렇게 대형인파에 깔려 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한 경우는 지금껏, 사우디의 이슬람예배 참사, 아르헨티나의 축구경기, 인도네시아 축구경기 등 3건 정도 밖에 없었다. 어떤 축제에서 좁은 골목길 때문에 아까운 청년들이 이렇게 까지 떼죽음을 당한 사고는 여태 없었다. 경찰과 서울시(전철등)의 사전 대비능력이 치밀하지 못한데 따른 인재(人災)의 측면이 있다.

 둘째는 켈트족의 저승혼백과 무관한 헬로윈 데이가 한국에 5년여 전 상륙해서 갑자기 청년들의 한바탕 놀자는 밤 문화로 변해버린 것은 아닌지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도 한때 상혼(商魂)에 떠밀려 반짝 했다가 요즘 시들해진 것 같긴 하다. 핼로윈데이도 백화점등 상혼 때문에 부풀려진 측면이 없는지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국가와 국민의 큰 불행을 정쟁 논리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국가차원의 애도에 집중해야 할 때이며, 유족 위로와 장례 절차 그리고 원인 규명 및 재발 방지 등에 만전을 기해야한다. 그리고 언젠가 책임소재도 분명히 따져야 참사를 미연에 막을 수 있다.

 채 피지도 못하고 져버린 꽃다운 생명들의 희생이 너무도 억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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