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 싶은 엄마 】

남 덕 현
(佛名:불명<法勝: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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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는 월회비를 못 내어서 학교에서 쫓겨나는 날이 많았는데 봄이면 남산 뒷골(남산 띠꼴 이라고도 함)에 올라 송곳대(봄에 소나무에 새순이 나면 겉껍질을 벗긴 속살)를 먹었고, 여름철이면 책 보따리 둘러메고 혼자 부름(만림산 밑으로 흐르는 대독천)으로 가서 종일 물놀이를 하며 놀았다. (그때는 부름이 깊어서 물귀신이 나온다고 했음) 가을에는 배가 고파서 남의 밭에 가서 고구마를 파먹거나 감나무의 풋감을 따먹었는데 주인에게 붙잡혀서 두들겨 맞는 경우도 많았다. 겨울에는 율대리 덤벙에서 썰매를 타다가 얼음구덩이에 빠져서 죽을뻔한 일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어릴 때부터 혼자였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돈이 없어서 월회비를 3개월마다 한 번씩 주었다. 그렇게 6년의 세월이 흐르고 엄마와 나는 도둑골에서 동외리 정동의 산비탈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셋방살이 이사를 왔다. 그때는 고성중학교에 입학하려면 시험을 쳐야 했는데 떨어지는 아이가 많았다. 나는 재수가 좋아서 겨우 붙었지만,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었으며, 말이 없고 친구도 없는 외톨이 아이로 청소년 시절을 시작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욕을 하면 듣고만 있었고 때리면 맞고만 있었다. 나는 힘도 없고 도와줄 형제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외롭고 불쌍한 아이였다. 그렇지만 이 못난 자식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너무도 강했다. 학교 성적은 거의 꼴찌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어느날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나는 이대로 시골 촌에서 살 수 없다. 도시학교로 가자. 그래서 공부가 끝나면 취직도 하고 돈을 벌어서 엄마 은혜를 갚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명문고는 아니지만, 통영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내게 비웃는 표정으로 화내시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네가 그 형편없는 성적으로 통영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써달라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냐? 안돼! ” “선생님! 그냥 원서 한 장 버리는 셈 치고 입학원서 써 주이소.” 마치 경찰 앞에서 취조받는 죄인처럼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밷는 가장 용기 있는 말 한마디였다. “아! 엄마! 엄마! 불쌍하신 우리 엄마! 공부를 못해서 죄송해요! 공부를 못해서 죄송해요! 다음엔 잘할께요.” 겨울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통영고교에서 입학시험을 쳤고 운이 좋게도 학교 게시판에는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학생이었다. “사람은 운명대로 사는 것일까?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이 상위권으로 쑥쑥 올라갔다. 자취방에서 혼자 밤늦도록 공부하다가 코피를 쏟는 일도 잦았다. 고교 시절도 배고픔과 가난과 외로움으로 나의 사춘기 시절을 우울하게 보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슬픈 노래를 좋아한다. 패티킴의 9월의 노래, 남인수의 산유화. 조영남의 고향의 잔디 등. 학교 성적이 놀라울 정도로 올라가자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지만 나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친한 친구도 없었다. 국민학교, 중학교 때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나를 바보 취급했지만 나는 본래 바보가 아니었다. 불우한 내 환경이 나를 바보로 만든 것뿐이었다. 그런 결과로 훗날 내가 초등학교 교장이 된 뒤에도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을 제일 먼저 챙겼다. 가난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나는 어린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친구들은 대학시험 친다고(그때는 대학별로 본고사 입학시험을 쳤음) 야단일 때 가난 때문에 대학은 엄두도 못 내고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청소년기라 내 모습은 너무 초라하고 마음은 무척 슬펐다. 고교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상위권의 내 성적은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졸업장과 상장도 받았지만 자취방 구석에 던져버리고는 통영의 문화동 판자집의 자취방에서 보따리를 싸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가난해서 점심은 아예 걸렀고 저녁은 보리죽만 먹는 경우가 많았으며 나의 몸은 비쩍 말라 있었다. 우리 논은 4 마지기 였었는데 한 곳은 칙메(용산으로 가는 찻길 옆의 무덤이 있는 작은 산) 앞이요, 또 다른 곳은 서 무덤이(서장군 묘라고도 함) 앞에 있었고 엄마와 나의 생명줄이었다. 엄마가 구라분 장사를 해서 산 논이었다. “엄마! 고마워요. 고마워요.” 농사일에 정신이 없던 6월 어느날 들일을 마치고 집에 늦게 도착해보니 마루에 등기 편지 한 통이 놓여있었다. 발신은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덕현군에게! 잘있나? 다름이 아니고 경남교육청에서 국민학교 강사를 모집하는데 (그 당시는 농어촌 교사가 부족 했음) 올해 고교졸업생 중에서 학업성적이 우수하면서 집안이 가난한 학생 1명만 추천해 달라고 교장 선생님 앞으로 공문이 왔다. 그래서 너를 추천하고 싶은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나는 그길로 선생님을 만났고, 학교생활기록부와 학년 석차 및 학 반 석차가 기록된 전체 학년 성적증명서와 학교장 추천서를 제출하여 국민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통영의 원산리 도원국민학교(지금은 폐교됨)에서 선생님이 되었다. 그때가 내 나이 21세 때였다. 그렇게 1년여의 세월이 흘렀을 즈음 서울대학교 부설 방송통신대학교 초등교육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하게 되었고 국민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이 나왔다. 정식 선생님이 된 것이다. 그 이후 진주교육대학교가 4년제가 되자 입학하여 졸업을 하였으며,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 4년제가 되자 다시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불우한 환경과 처절한 가난에 찌들어 살던 젊은이가 21살의 나이로 국민학교 교사로 시작하여 벌써 5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겼다. 내 팔자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한가지 변하지 않은 내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하고 공부 못 한다고 학생을 미워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상리면 공원묘지에 유골로 누워계시는 내 엄마! 찾아갈 때마다 눈물을 훔친다. 25세의 새색시가 6.25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고 시집에서 쫓겨나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청상과부로 살아온 인생 여정을 모두 잊어버렸는지 한마디 말씀도 없으시다. “엄마! 제가 세상에 태어날 때처럼 지금도 혼자입니다. 옛날 그때처럼 외롭습니다.” 한 번 가신 우리 엄마! 돌아올 줄 모르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우리 엄마 보고 싶어! 나도 갈래! 나도 갈래! 엄마 따라 갈테야!” 이런 이야기를 아내에게 한들, 자식에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와 어머님만 안다.
 전쟁통에 혼자 독신으로 태어나 아버지도 형제도 없는 상황에서 엄마와 둘이서 맨손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내 이야기를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어느 정도 이해할까?
 74세 노인의 숨겨졌던 속살을 독자들 앞에 발가벗으니 추한 모습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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