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 싶은 엄마 】

남 덕 현
(佛名:불명<法勝:법승>)
kbs491015@hanmail.net

 74년 전 내가 태어난 곳은 구만면 효락리이다. 그 당시의 농촌풍경은 낱말 그대로 가난과 궁핍의 살아있는 현장이었다.
 6.25 전쟁으로 인민군이 구만면 청사를 폭파해서 호적이 모두 사라진 까닭으로 새로운 호적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고성읍 동외로 정동이다. 엄마는 맏아들인 아버지와 결혼하여 시동생 3명, 시누이 2명, 모두 6명의 가족과 시부모님을 한집에서 모시고 살았으니 보통 힘든 시집살이가 아니었다. 내가 2살 되던 해에 6.25 전쟁이 일어나서 인민군이 마을에 밀어닥쳤는데, 아버님이 인민군에 의해 돌아가시자 엄마는 25살의 청춘과부로 “저년이 내 아들 잡아먹었어!”라는 할머니의 구박으로 2살배기 나를 끌어안고 시집에서 맨몸으로 쫓겨났다. 살길이 막막한 엄마는 두디(아기를 등에 업을 때 사용하는 기다란 보자기)로 나를 업고 산과 들길을 밤낮으로 걷고 걸어서 친정으로 찾아갔지만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오빠! 밥 한 끼만 주이소. 배가 고파요! 벌써 사흘을 굶었어요!” 엄마는 잘사는 친정 오빠 집 대문 앞에서 울고불고 사정했으나 “죽어도 시집에서 죽어라. 친정에는 뭐하러 왔노? 정말 남이 부끄럽네.” 엄마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엄마! 엄마! 불쌍하신 우리 엄마 어떡하면 좋아요? 엄마! 보고 싶어!” 그래서 정처 없이 걸어서 안착한 곳이 고성읍 동외리 재미 언덕(지금의 남산공원 남산정 자리)의 동쪽 산자락 끝인 도둑골 맨 끝 집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빈집이었다. 한 칸짜리 방이었는데 방바닥의 절반은 흙바닥이었고 절반은 낡은 갈대로 엮은 떨어지고 더럽혀진 돗자리였다. 겨울에는 방바닥이 얼음덩이 같아서 누울 수가 없었고 엄마는 나를 안고 누더기 같은 이불을 둘러쓰고 밤잠을 앉아서 잤다. 여름에는 모기에 뜯겨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밥그릇과 수저는 있을 리가 없었다.

 돈 한 푼 없던 맨손의 엄마는 살아남기 위해서 어린 나를 등에 업고 마을마다 다니면서 구라분(얼굴에 바르는 화장품)장사를 시작했다. 외상으로 물품을 구입해서 돈을 벌면 갚는 방식이었다. 때로는 실과 바늘과 골무도 팔았다. 밥은 젊은 여자와 어린 아기가 불쌍하다고 남의 집에서 얻어먹었고 구라분 하나를 팔려고 하루에 100리 길을 걸을 때도 있었다. 거류면과 동해면 쪽으로 주로 갔는데 집집마다 걸어서 동해면을 한 바퀴 도는 경우도 많았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면 늦은 밤중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올 때는 밥과 반찬을 얻어왔다. 포장이 안 된 자갈길을 26살의 젊은 새댁 과부가 아기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구라분이 담긴 바구니를 이고 떨어진 고무신으로 걸었던 것이다. 배고파 보채는 어린 나를 등에 업고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흐른다. “엄마! 엄마! 불쌍하신 우리 엄마! 불쌍하신 우리 엄마! 어떡하면 좋아요!” 내 나이 다섯 살이 되자 엄마는 새벽같이 장사를 떠나고, 나는 방에 군불을 지피기 위해서 까꾸리(갈퀴)와 바구니를 들고 뒷산에 올라 갈비(땅에 떨어져 말라버린 소나무 잎)를 긁어모았다. 엄마의 칭찬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밤늦게 구라분(화장품) 장사에서 돌아오셨는데, 호롱불 밑으로 보이는 헝컬어진 머리카락과 초췌하고 남루한 옷차림, 다섯 살 아이인 내 눈에도 너무나 처량하고 고달파 보였다. 그때의 엄마 모습이 어제 본 것처럼 내 뇌리에 뚜렷이 떠오른다. “아! 엄마! 죄송해요. 그냥 저를 버리고 도망이라도 가세요. 불쌍하신 우리 엄마 어떡하면 좋아요. 아! 엄마! 엄마!” 까꾸리(갈퀴)로 긁어온 갈비(땅에 떨어져 말라버린 소나무 잎)를 아궁이에 넣고 군불을 지펴놓으면 엄마는 너무나 좋아하셨고 나도 덩달아 좋았다. 구라분(화장품) 장사를 안 가시는 비가 오는 날에는 엄마는 두 다리를 방바닥에 뻗어놓고 앉아서 슬픈 목소리로 크게 우셨다.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내 팔자야! 어린 자식 데리고 나 혼자 우찌 살꼬!” 서럽게 서럽게 우시던 엄마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부었고 눈물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다섯 살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너무 슬펐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슬픔이란 단어를 그때 이해하였다. 전쟁통이라 뒷산 꼭대기 재미 언덕에 관도 없이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시신 그대로 묻어버린 아버님 무덤을 찾아 엄마가 대성통곡을 하시는 날에는 나도 덩달아 울었다. 영문도 모른체---------“엄마! 울지마! 엄마! 울지마! 엄마! 우는 거 싫어! 으 , 으 , 으엉!, 엉! 엉! 엉! 엉!” 엄마와 내가 슬피 우는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도둑골 골짜기를 타고 산 아래 동네까지 울려 퍼졌다. “엄마! 엄마! 불쌍하신 우리 엄마! 어떡하면 좋아요!” 동네 아이들은 나를 만나면 돌멩이를 던지며 놀려대기 일쑤였고 나는 힘없고 말 없는 외톨이 아이가 되어갔다. 함께 놀아줄 소꼽 동무들이 그리웠지만 누추한 내 모습 가까이 어떤 아이도 오지 않았다.

 아홉 살이 되자 마을 구장님(지금의 이장님)을 따라 이른 봄날에 고성국민학교에 입학하러 갔다. 아이들은 깨끗한 옷차림으로 왼쪽 가슴에는 코흘리게 손수건이 달려있었고, 어머니 손을 잡고 즐겁게 입학식에 왔으나, 나는 누더기 같은 옷차림으로 운동장 구석진 곳에서 혼자 외톨이가 되어있었다. 운동장 구석에 남루한 옷차림으로 고아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나에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담임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남덕현!” 남덕현! 어디 있어? 말을 해! 아이가 없잖아!“ ”예! 선생님! 여기 있어요!.“ 작고 힘없는 내 대답은 선생님 귀에 들리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과 학부모님의 이상한 눈빛이 나에게 모두 쏠렸고 나는 겁이 덜컹 났다. 그때는 도로가 자갈길이었는데 국민학교 입학식을 마친 나는 구멍 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몰티고개(동외리에서 남산 아파트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어가기 전에 너무 힘이 없고 배가 고파서 길가에 쓰러졌다. 지금의 청년회의소 앞에서 조경문(작고하신 고성읍 농협장) 아저씨가 말 구루마(수레)를 한길 가에 세워두었는데 그 위에 기절을 해서 잠이 든 것이었다. 엄마는 나를 찾아 밤새도록 헤매었고 다음 날 아침에 발견되어 도둑골에 있는 집으로 어머니 등에 업혀 갔다. 영양실조로 내 머리 전체에는 버짐(하얀색의 피부병)이 박꽃처럼 피었는데 지금도 고성초 51회 졸업생 앨범을 보면 까까머리 전체가 버짐으로 새하얗다.
 그때는 월회비(사친회비, 기성회비라고 함: 한 달에 한 번 내었음)를 내어야 학교에 다녔는데, 나는 월회비 낼 돈이 없어서 선생님께 눈치받으며 교실에서 자주 쫓겨났고, 그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월회비 내놓으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 아! 엄마 죄송해요. 아! 엄마! 죄송해요. 엄마! 잘못했어요.“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