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죽을 때 남기는 것은 한 봉지의 하얀 뼛가루 】

남 덕 현
(佛名:불명<法勝:법승>)
kbs491015@hanmail.net

 당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신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간다면 그것보다 더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면서 당신의 몸을 당신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평생 먹이고 입히고 치장시켰으나 걸핏하면 병들고 고통스러워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죽는다.
 그래도 당신은 몸을 자기라고 생각하면서 아프면 약 먹이며 간호하며 보살피는 일에 열중한다. 그럼 당신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당신인가? 당신 입으로 나오는 말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 머릿속에서 말하는 당신이라는 주인공이 들어있는가?
 당신의 뇌를 쪼개보면 하얀 단백질 덩어리뿐인데--당신이라는 실체가 없는데 당신이 어디 있는가? 어리석은 생각이다. 당신의 몸과 생각이 세월 따라 시시때때로 변해가는데 누가 당신이란 말인가? 만들어진 것은 낡아서 부서지기 마련이고 태어난 것은 늙고 병들어 죽기 마련이다. 당신이 나라고 믿는 것은 몸에 있는 5개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껴진 의식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눈(眼根)・귀(耳根)・코(鼻根)・입(舌根)・몸(身根)을 말한다. 다섯개의 감각기관으로 안식(眼識)은 볼 수 있는 능력과 인식을, 이식(耳識)은 들을 수 있는 능력과 인식을, 비식(鼻識)은 냄새를 맡는 능력과 인식을, 설식(舌識)은 맛을 알 수 있는 능력과 인식을, 신식(身識)은 촉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인식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당신의 죽음과 함께 5개의 감각기관이 죽으면 당신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쉽게 풀이해보면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먼저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설명해 달라고 말하면 당신은 대답할 수 있는가? 인연에 의해서 끝없이 변화해가는 당신이기에 당신이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어서 그렇다. 뭐라고? 당신 이름과 몸과 생각이 당신이라고? 그럼 당신 몸통과 손가락이 당신이라는 말인가? 그럼 손가락아! 하고 당신을 불러도 대답하겠군. 아기 때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의 어떤 몸이 당신의 실제 몸인가? 그럼 하루에도 수만 번씩 변하는 당신의 생각 중에서 어느 생각이 당신인가? 당신의 이름이 당신이라고? 그럼 당신 이름을 바꾸면 당신도 달라지는가? 당신 영혼이 당신이라고? 그 영혼이 당신의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머리에? 심장에? 창자에?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다. 아마 죽고 난 뒤에는 영혼이 있을거라고 생각할 문제이니 산 사람에게 영혼 타령은 말자. 그럼 사람이 죽으면 어디에서 영혼이 따로 만들어지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본래 당신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육신이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육신은 지(흙). 수(물). 화(따뜻함). 풍(숨소리)이 인연 따라 모여있는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똑똑하니, 잘났니, 못나니 하면서 자랑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하고 고통에 빠지기도 한다. 모두가 허깨비 놀음에 장단을 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내가 없는데 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온갖 욕망과 괴로움과 번뇌 망상이 시시때때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도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물을 보면서 소리를 들으면서 촉감을 느끼면서 냄새를 맡으면서 나타내는 인식 작용이 고정관념으로 변해서, 그 인식 작용이 저장되어 있다가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즉 사물을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감촉을 느끼므로 인해서 인식 작용이 일어난다. 바깥 환경이 없다면 인식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당장 눈을 감아보아라.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런 인식 작용이 쌓여서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과 자신만의 가치관이 형성되며 그 기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결과로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며 탐욕이 일어나고 미움과 후회와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것 네것이 있고 나와 당신이 있는 것이다. 소유하려는 욕심과 다툼과 이해관계가 일어나는 것이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부부는 남남끼리 만난 개별적인 특성을 지닌 존재이다. 내 남편 내 아내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이다.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부부란 과연 무엇인가? 당신은 남편이나 아내와 한평생을 살아오면서도 부부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냥 만났으니 그럭저럭 살아가는가? 부부는 이질적인 개체의 물리적 동거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부부는 돌아눕지 않아도 남이다. 부부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비례하여 멀어져간다. 신혼부부는 태어남이요. 중년 부부는 늙고 병듦이요. 노년 부부는 죽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헤어진다. 사람은 태어날 때도 혼자이듯이 죽을 때도 혼자 떠난다. 내것이 아니니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혼이란 처음 만난 남자와 여자의 동거 계약이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이질적인 청춘 남녀가 함께 생활하는 물리적 화합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그러니 내 아내요. 내 남편이요. 하면서 그렇게 다른 사람 앞에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못 된다. 무늬만 부부인 셈이다. 부부에게 너무 집착 하지 말아야 한다.
 부부가 한마음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부부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나와 남편이나 아내의 생각은 어쩌다 같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구조와 환경이 전혀 다른 개체에서 출발한다. 아내나 남편을 내 것이라고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니 갈등과 불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내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는가? 마누라도 남편도 자식도 집도 돈도 모두 잠시 동안 내게 머물다가 언제든지 자기 갈 길로 떠나버린다.
 마누라도 남편도 자신의 편리함과 욕구 충족을 위해서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 원인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에 자신의 유익부터 먼저 생각하며 타인의 일에 관심이 적어지고 웬만하면 관여하지 않으려는 현상을 보여준다. 자신의 편리함과 이익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자녀는 성장하면 자기 살길 찾아 떠나며 남편이나 아내는 늙으면 친구 따라 떠난다. 세상에는 내 것은 없다. 다만 남이 인정하는 동안 사용할 권리를 가진 것뿐이다. 그리고 가진 것은 사용하지 않으면 없는 것보다 못하며 존재나 소유는 일시적일 뿐이다. 그러니 오히려 보관이라는 말이 옳을지 모르겠다. 보관하면서 사용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말만 해서는 안 된다.

 말은 의사표시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의미 없는 말은 없으니 말하는 사람에게는 소중하다. 그럼에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사람이나 ‘그건 네 생각이고’라면서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말은 상대방이 듣지 않으면 소음에 불과하다. 나만 옳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일수록 남의 말은 들어 보지도 않으려고 하니 다른 사람의 생각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몸은 부모님이 주신 유전자와 자연에서 얻은 지(흙)·수(물)·화(따뜻함)·풍(숨소리) 등 원소로 이뤄져 있다. 그 몸을 나의 마음이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몸을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기도 하지만 내 것은 아니다.
 사람의 기본적 욕구인 생명 유지와 소유에 대한 욕구가 왜곡되게 빚어져 ‘내 것’ ‘네 것’을 나눈다. 몸이라는 것이 늘 내 곁에 있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니 몸도 내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실상 몸은 부모와 자연에서 받은 것이고 죽게 되면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잠시 내 곁에 온 몸이니 빌리거나 세 들어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언젠가는 돌려줘야 할 물건이니 잘 쓰고 돌려주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계좌에 얼마만큼의 돈을 소유하고 있을까? 집과 차, 부동산 등은 누구에게 등기가 되어 있을까? 내 계좌에 찍혀 있고, 내 앞으로 등기되어 있다고 내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그것은 사람 간의 약속에 불과하다.
 사람들끼리 모여 그렇게 하자고 한 것에 불과하지 모든 것에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내 주머니 속의 돈은 내 것이 아니며, 집과 차 등도 실상은 내 것이 아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장신구 등의 모든 물건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모두 내 것이 아닐까? 내 곁에서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것’ ‘네 것’으로 나누기에 번뇌가 일어나고 그 번뇌가 눈덩이 불어나듯 불어나서 지금의 `나`와 `네 것을 내세우는 것이다. 아상(나(我)’ 혹은 ‘자아(自我)’라는 생각). 인상(나와 남을 나누는것). 중생상(본능적 고집) .수자상(늙지 않으리라는 생각,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 그것은 온갖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도록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보면 될 것을 ‘내 것’ ‘네 것’으로 나누니 인생이 괴롭고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의 가르침을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을 마음으로 새긴다면 그 무엇이든 내 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일은 아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는가? 마누라도 남편도 자식도 내 것이 아니다. 잠시동안 만나고 있을 뿐이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마음은 평화로워지고 고통과 괴로움은 사라진다. 다만 지혜롭지 못하고 고집이 센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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