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쁜 씨앗에 좋은 환경을 부여하면 죄의 꽃을 피운다 】

남 덕 현
(佛名:불명<法勝:법승>)
kbs491015@hanmail.net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정신세계가 있으니 선[善]과 악[惡]의 세계이다. 그곳에는 날마다 예쁜 꽃이 수시로 피었다 지면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긴다.
 선[善]의 씨앗에 좋은 환경을 부여하면 선[善]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서 선[善]의 열매가 열리므로 당신은 선[善]한 사람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악[惡]의 씨앗에 좋은 환경을 부여하면 악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서 악[惡]의 꽃이 피고 악[惡]의 열매가 열려서 당신은 악[惡]한 사람으로 불행한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선[善]의 씨앗과 악[惡]의 씨앗 모두에게 좋은 환경을 부여하면 당신은 교활하게도 선[善]한 일과 악[惡]한 일을 되풀이하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는 삶이 된다. 선[善]의 씨앗에 좋은 환경을 부여하면 욕심이 사라지며 생명을 존중하게 되고 가난한 사람이거나 불우한 이웃에 연민을 느낀다. 선[善]을 베풀므로 기쁨을 느끼며 자신의 욕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고 포용력이 많으며 처음 보는 사람과 곧바로 잘 어울리며 항상 바른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악[惡]의 씨앗에 좋은 환경을 부여하면 인간의 심성은 얼음처럼 냉담해지고 타인의 불행을 즐거워하며 오로지 자신의 욕구 충족에만 집중한다. 재앙을 만난 사람을 외면하며 무 감동적이고 양심을 잃어버리며 매사에 자기중심적이다. 옳지 못한 일에 쉽게 기뻐하며 사소한 일에 감정이 잘 상하고 무엇이든 부정적으로 보며 자비로운 마음이 없이 허욕을 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에 당신이 필자에게 선[善]과 악[惡]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선[善]과 악[惡]이라는 실체는 없고 그것을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때에 따라서는 선[善]이 될 수도 있고 악[惡]이 될 수도 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선[善]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요. 악[惡]은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그런 일반적인 선[善]과 악[惡]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사회가 발달할수록 악[惡]한 일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하여 나타나며 인간에게 해로움을 끼치기 때문이다. 당신은 선[善]과 악[惡]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으며 어느 곳에 좋은 환경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선한 사람 혹은 악[惡]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 당신이 표현하고 나타내는 결과에 따라 어떤 곳에 더욱 좋은 환경을 부여했는지 판단할 수 있다.

 사과나무에 어떤 좋은 환경을 부여해도 감은 열리지 않는다. 범죄는 악의 종자에 좋은 환경을 부여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이라도 악[惡]의 종자에 좋은 환경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선악이라는 개념이 상대적이라서 그 구체성에 대해 실체를 설명하기란 부적절하지만, 말이다. 당신이 권력 있다고 부자라고 자랑하고 허세를 부리고 살았지만, 아니 가난에 찌들어 살았지만 죽을 때가 되어 남는 것은 한평생 밥 먹고 똥 싸고 욕심부리고 타인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것밖에 남는 게 없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구분 없이 죽을 때는 하얀 뼛가루 한 봉지만 남긴다. 그러니 살아있을 때 사람답게 사는 것이,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라는 것이 인생 대대로 지어온 죄악의 씨앗인 업보[業報]라 자신의 죄업에 따라 살뿐이니 지금이라도 죄업의 사슬을 끊고 사람답게 살아서 악의 고리를 끊는 것이 중요하지만 당신은 어리석음과 자기 고집과 욕심에 눈이 멀어서 한평생 죄의 업(業)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숯은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결코 희어지지 않는다. 필자가 이런 글을 쓰면 매우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질타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말에 영향을 받지 않고 당신의 실체에 대해서 담론을 나누고자 한다. 사람이란 뭔가? 일종의 동물에 불과하다. 나도 당신도 사람이며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자부하지만 알고 보면 일반 야생동물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마치 일반 동물과 다르게 특별한 존재처럼 행세하고 있으며 삶을 유지 시켜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당신의 삶은 몹시 괴롭고 피곤해진다. 각종 속임수와 위선과 그것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다. 그런 결과로 갈등과 반목과 불화 속에서 고달픈 인생살이를 하다가 인생을 끝맺게 된다. 당신 마음속의 악[惡]의 씨앗이 자라지 않도록 악의 종자에 좋은 환경을 부여하지 않기를 바라며 혹시나 악[惡]의 씨앗에서 싹이 튼다면 순식간에 잘라버리는 삶이 진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러지 못하고 악[惡]의 씨앗에 따뜻한 햇볕과 적당한 물을 공급함으로 그것이 자라나서 당신의 입으로부터 악[惡]한 말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의 심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음속에 항상 악[惡]한 욕심만 품다가 악을 행하며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악한 사람이 선[善]한 사람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건 오해이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힘쓰지 마라. 불가능한 일이다. 동물에 비유한다면 곰은 곰대로의 성질이 있고 여우는 여우대로의 성질이 있으며 호랑이는 호랑이대로의 성질이 있고 삶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기꾼은 사기꾼의 삶이 있고 도둑놈은 도둑놈의 삶이 있고 악한 사람은 악한 사람의 삶이 있고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삶이 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과 함께 살거나 악한 사람끼리 사는 그곳이 지옥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선한 사람 만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 모양만 하고 있다고 모두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이 지천에 늘려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종자 자체가 동물의 종자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주위 환경에 따라 쭉정이로 성장한 사람도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는 어떤 종자인지 알 길이 없다. 그 종자가 점점 성장하면 그 실체가 밖으로 드러나서 그가 가진 동물적 습성을 나타내기 시작하면 알게 된다. 인간이 성장해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면 그때서야 선한 종자인지 악[惡]한 종자인지 알게 된다. 악한 인간의 삶의 모습의 서서이 드러나는 것이다. 심지어는 열매가 열리기 전이라도 이웃이 바른길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덩굴로 감아서 훼방하기도 한다. 남에게 기생하여 영양분을 빨아먹고 성장하며 결국에는 자기에게 영양분을 공급한 자를 말라 죽게 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외부환경에 의해서 그것이 일부분 감추어질 수도 있지만, 내면에는 악의 꽃을 피우기 위한 성장이 추진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결과로 선의 열매와 악[惡]의 열매가 나타날 즈음에는 사회적 문제를 이미 일으키기에 모든 환경이 갖추어져서 그 특성들이 비인간적이며 폭발적으로 나타나니 그것이 각종 범죄로 증명시킨다. 그것을 비유적으로 사과나무에는 사과만 열리며 감나무에는 감이 열릴 뿐이라고 표현한다. 도둑놈은 도둑놈일 뿐이다. 도둑놈이 아닌 경우에는 잠시 도둑질 본성이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을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어리석음은 결국 그것의 결과로 범죄를 낳는다. 그러니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물론 사소한 부분까지 선악으로 분별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선을 베풀면 선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 상식이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면 자비가 되돌아 올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을 베풀었지만 악[惡]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으며 가는 말이 고왔지만 오는 말이 나쁜 경우도 있다. 그러니 함부로 선을 베풀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지만 성서에서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한다. 즉 자비를 베푸는 사람에게 자비를 주라는 말이다. 자비는 어떤 것인지 예수가 말한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이스라엘 화폐)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치료비용)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와 같은 정신세계가 당신이 꿈꾸어왔던 이상세계가 아닌가?
 당신은 악으로 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당신 마음속의 악의 씨앗에 좋은 환경을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사람으로서의 진정한 행복이며 즐거움이다.
 당신은 하루살이처럼 살아서는 안 되며 베풀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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