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겪는 마음의 고통(苦)이 연기(緣起)에 의해서 생성[生成], 윤회(輪廻)하는 과정 】

남 덕 현
(佛名:불명<法勝:법승>)
kbs491015@hanmail.net

 필자는 복잡한 세상 이야기를 떠나 잠시 정신세계로 들어가고자 한다. 당신은 고(苦)의 생성과정을 이해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행복이란 고(苦)에서 벗어나려는 정신세계의 무아(無我) 작용 현상이다.
 부처님은 본래 불교라는 종교를 만들지 않았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겠지만 성인(聖人)이 그 제자들에 의해서 신성화(神聖化)되면서 공동체로 형성된 것이 종교다. 그래서 부처님 설법의 특징은 불교의 교리를 제창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서 그것으로 인하여 당신이 고통(苦)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데 있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무(無)에서 새로이 창조된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했던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내가 불법(佛法)을 전한 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모든 자연현상의 이치가 불법(佛法)인 것이다. 다만 인간이 어리석어서 모를 뿐이다.
 진리를 말하던 성자(聖者:석가, 예수, 공자 등)들도 죽었고 깨달음을 얻었다던 선사(禪師)들도 흙으로 돌아갔다. 다만 성자(聖者)들의 말씀만 남아서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진리의 등불로 남아있을 뿐이며 윤회(輪廻)는 연기(緣起)의 과정으로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연기(緣起)는 생멸(生滅)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혀준다.
 노사(老死)란 늙음과 죽음을 의미하며 삶의 모든 괴로움을 총칭한 근심, 비애, 고통, 번뇌(憂悲苦惱)를 말한다. 모든 존재는 생(生)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있게 된다. 이 피할 수 없는 노사(老死)의 모든 괴로움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태어남[生]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즉 삶의 고통은 태어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전 과정 즉 생노병사(生老病死)를 괴로움이라 한다. 그러면 생(生)은 무엇이 있으므로 있는가? 생(生)은 집착을 여의지 못한 존재[有]가 있어서다. 또한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 좋은 것과 싫은 것을 실체가 있는 존재로 고착화 시키다 보니 태어난 것은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을 맞게 된다. 존재(有)는 어떻게 있는가? 집착 때문에 있다. 취(取)는 집착의 의미로서 인간의 미혹한 생존은 집착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맹목적인 애증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집착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애욕 때문이다. 애욕이란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보통 목이 타서 갈증이 나면 오로지, 물을 구하려는 생각만 나는 것처럼, 항상 능동적으로 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맹목적, 충동적 욕망을 말한다. 애욕은 왜 생기는가? 받아들인 느낌과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받아들임이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과 그 감수(感受) 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인식 작용 등의 3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이 생기게 되고 그다음 수(受)가 발생하는데 이 수(受) 때문에 애욕과 갈애(渴愛)가 생기게 된다.
 접촉(觸)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수(受)가 있기 때문이다. 촉(觸)이란 지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인 힘이다. 모든 촉(觸)은 6가지의 감각기관(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음(意))에 의한 6촉(六觸)이 있다. 촉(觸)은 6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6입(入) 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6입(根) 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그러면 촉(觸)은 무엇의 원인으로 생기는가? 그것은 6가지 감각기관(六入) 때문에 생긴다. 6입이란 대상과 감각기관과의 대응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6입(入)은 무엇으로 인하여 있는 것일까? 명색(名色)으로 인하여 있다. 명색(名色)은 정신 현상을 표시하는 명칭과 그리고 물질을 나타내는 색(色)을 합친 것을 의미한다. 6입의 대상이 명색(名色)이다. 그렇다면 명색(名色)과 그에 대응하는 6입(入)인 감각기관만 있으면 인식 활동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상태에서 결코 인식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반드시 식(識)이 있어야 한다. 죽은 사람이 꽃을 보거나 만질 수 없듯이, 식(識)이 없으면 인식 활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식(識)은 명색(名色)이 있기에 존재하고 명색(名色)은 식(識)이 있기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이 6입(入)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각기관인 6입(入)과 그 대상인 명색(名色) 그리고 인식 주관인 식(識)이 다 함께 갖추어졌을 때만이 사물과 접촉하는 인식 활동을 하게 된다. 여기서 식(識)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심층 의식도 포함한다.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본 경험과 정보가 심층 의식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식(識)은 어떻게 있는가? 행(行)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행(行)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행(行)으로 인하여 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행(行)이란 이미 몸과 입과 뜻에 의해서 형성된 선행 정보들이다.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에너지의 형태로 행(行)이 있지 않으면 상응하는 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경험된 행위가 지식정보, 성격, 습관, 소질 등의 에너지로 축적된다. 마지막으로 행(行)은 왜 생기는가? 무명(無明) 때문에 행(行)이 일어나는 것이다. 무명(無明)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 지혜)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緣起)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 고(苦)·집(集)·멸(滅)·도(道))에 대한 무지이다. 이것은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 그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으로, 즐거움을 탐하고 추구하는 갈애, 살아남으려고 하는 갈애, 죽음에서 떠나고자 하는 갈애 등이 바로 그 원인이라고 하는것. 괴로움은 완전히 멸할 수 있으며 괴로움을 없앤 상태, 괴로움을 멸하기 위한 바른 방법이다. 괴로움은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無明)은 모든 고(苦)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연기(緣起)의 구체적 어휘를 풀이해보면 무명(無名)은 짙은 안개 속에서 정처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 또한 밝지 않아서 어떤 그릇된 생각을 하고도, 그것이 옳은 생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모두 ‘무명(無明)’ 때문이다. 행(行)은 무명(無明)에 의해서 그릇된 것을 옳은것이라고 판단하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발생하게 되고, 그렇게 발생한 대상을 실재화, 구체화하려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식(識)은 행(行)에 의해 실재화, 구체화 된 대상이 생성되면 그 대상에 대해 무의식적으로나 또는 의식적으로 분별하고, 식별하게 되는 현상이다. 명색(名色)은 식에 의해 어떤 대상을 분별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인식에 의해서 그것이 물질적 존재인지 비물질적인 존재인지의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육처(六處)는 명색에 의해 어떤 대상을 물질적 존재인지 비물질적 존재인지 판단하게 되면 다음에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뜻(意)에 의해 새롭게 그 대상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은 무엇인가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만지고 생각할 수 있다. 촉(燭)은 육처에 의해서 그 사물을 인식하게 되면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燭)· 법(法)이 발생한다. 이것을 촉(燭)이라 한다.
 모든 인간은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인식하게 되며 반드시 촉(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촉(燭)이란 접촉을 말하며 자극에 대한 반응을 뜻한다. 수(受)는 촉에 의해서 어떤 사물의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이 발생하게 되며 그것에 대한 苦(괴로움), 樂(즐거움), 不苦不樂(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 중에서 느낌이나 감정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을 수(受)라고 한다. 애(愛)는 수(受)에 의해서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3가지 감정 중에 어느 한 가지의 감정이 발생하게 되며,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상만을 끝없이 갈구하는데 그것을 애(愛)라 한다. 이것은 자비와 같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으로서의 사랑이다. 취(取)는 애(愛)에 의하여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쏟아부었을 때 그 대상이 자신에게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면, 이후 그렇게 추구한 즐거움의 대상을 자기가 소유하기 위해 일을 하게 된다. 유(有)는 취(取)에 의해서 즐거움의 대상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생사(生死)의 존재(存在) 그 자체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생(生)은 유(有)에 의해서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그 사물이나 생각이 생성된다. 노사(老死)는 생(生)에 의해서 그 대상이 태어나면 그 무엇이었더라도 결국 늙고 죽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 태어나고, 또 늙고 죽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생각만으로도 괴로움이 발생한다. 이처럼 사람은 연기(緣起)에 의해 끊임없이 윤회한다.
 윤회란 습관화된 행동양식이 대를 이어가며 반복되는 패턴이다. 당신은 아직 젊어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애쓰지만 늙어 남는 것은 빈손 뿐이다. 그리고는 낙엽이 떨어지듯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당신의 몸은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서 본래 온 곳으로 갈 뿐이다. 그리고 다시금 인연(因緣) 활동 현상이 시작된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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