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평론가

 시절이 하수상하고, 나라에 리더는 없고, 죽기 살기로 분열만 획책하니 옛 선인들이 참세상을 일구었음에 벗이여 함께 취해 보세나! -月下獨酌(월하독작),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부터 읊은 후 해석하고 평해본다. 이와 관련된 두 편의 시도 마찬가지다.

 花下一壺酒(화하일호주)를,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이라./ 꽃 아래에 놓인 한 동이 술을, 권할 이(친한 이)도 없이 홀로 마시네. 擧盃邀明月(거배요명월)하니,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이라./ 잔을 들어 달을 맞이하고, 그림자를 더하니 셋 사람이로구나.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이라./ 달은 본래 술 마실 줄을 모르고, 그림자는 시종 내 흉내만 내는구나.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하니,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이라./ 잠시나마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이 봄의 밤을 함께 즐기노라.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하고, 我舞影凌亂(아무영릉란)이라./ 내가 노래하면 달은 머뭇거리고,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어지러이 따라하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이나,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이라./ 깨어서는 같이 즐기지만, 취한 뒤에는 각자 흩어진다네.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하여,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이라./ 늘 붙어 다니지만 정을 나눌 수 없으니, 다른 세상(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길 기약하네.

 월하독작 4편 중 2편으로, 《이태백시집》 권23에 게재된 4수의 1수이다. 방랑자이면서 술에 절이는 게 다반사였던 이백(701~762)이 꽃밭 사이에 한 동이 술을 놓고 마시나, 친한 이도 없이 홀로였겠다. 그러나 그 사이로 비추이는 고요 속 달, 그리고 그림자가 함께 했기에 애써 고독함을 피하려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취하면 셋(달, 그림자, 이백)이서 춤추는 착각에 빠질 정도이나, 끝내 혼자임울 알고는 애석해한다. 그러면서 다시금 정을 나눌 수 있는 아득한 은하에서의 재회를 기약한다. 그는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훗날 양귀비에 의해 궁 출입에서 멀어졌다. 이쯤에서 그가 대륙을 방랑하며 읊었겠다. 작자와 생성연대가 미상인 <달아달아 밝은 달아>를 1970년대까지 모내기 전에 동네 사람들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함께 즐겨 불렀음을 추억한다. 농번기가 오기 전에 마을의 화합과 번영을 위한 잔치로 온 동리 사람들이 덩실덩실 춤사위에 어린이들도 신이 났었다. 또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얼~시구 절~시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아니 놀지는 못 하리라 차차차 차차차.”도 단골 메뉴였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여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 년 만 년 살고지고, 천 년 만 년 살고지고.

 구전동요(口傳童謠)인 이 노래는 이태백(李太白)을 노래했다. 후세에, 그것도 이백에게는 이국(異國)인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도 신라·고려·조선·대한제국을 거친 작금의 대한민국 민초들 속으로 파고들었단 게 가상하지 아니하랴. 어찌 보면 진정한 영혼불멸의 삶이 아닐깐 생각마저 든다. 이태백이 달과 자신의 그림자를 벗 삼아 질펀하게 즐겼듯이, 우리나라가 산업화가 되기 전 농촌에서는 유교사상의 영향 하에 그랬었다. 그의 시는 자신을 포함한 셋이 노닐고 헤어져도, 아픈 이별이나 석별의 정을 나누는 의식은 필요 없었으리다. 농촌에서 성장한 필자는 이러한 전래동화에 묻힌 내 누이, 내 어머니, 내 할머니의 춤사위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또한, ‘월하독작‘이란 이 시를 1990년대 중반 중국어가 필요한 나머지 한국방송대학교 중문학과 학사 편입을 한 그해 3학년 때, <고급중국어1>에서 처음 접하고는 암송했던 기억이 난다. 이에 혼자 사유하거나 '홀로아리랑’을 노래할 때 이 시를 자주 연상케 한다. 이백과 양귀비는 궁에서 자주 마주친 안면이 있는 사이다. 그가 42세 때 당 현종의 부름을 받고 당시 수도였던 장안에 들락거렸다. 현종이 그에게 시를 짓도록 하자 당시 궁내 세력가였던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게 하고, 천하미인 양귀비에게는 붓과 벼루를 받쳐 들게 하는 도도함과 낭만이 깃들인 자세를 취했다. 그만큼 당 현종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백이 아무리 시성(詩聖)이라 할지라도 양귀비의 미모에 매료되고, 오동통한 젖무덤에 눈이 갔을 법도 하다. 안녹산과 화가로서 이름을 떨친 왕유, 그리고 두보와 동시대 인물로서, 그는 문뿐만 아니라 무예도 갖춘 호걸이었던 탓으로 내심 천하를 탐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한 그가 궁을 떠나 방랑 중에 쓴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도 한번 보자.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봉황대 위에서 봉황이 노닐더니/ 봉황은 떠나고 대는 텅 비고 강물만 저절로 흘러
吳宮花草埋幽經(오궁화초매유경) 晉代依冠成古邱(진대의관성고구)
오궁의 화초는 깊은 길속에 묻혔고/ 진나라 때 관리들은 옛 무덤이 되었구나.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二水中分白鷺州(이수중분백로주)
삼산은 푸른 창공의 바깥으로 반쯤 걸렸고/ 두 물이 가운데로 나뉘니 백로주로다.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모두가 덧없는 구름이 돼 해를 가리니/ 수도는 보이지 않고 인걸로 하여금 근심(시름)에 젖게 하누나!

 진정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지난 날 궁에 불려가 겪었던 사연에 빗댔다. 궁궐에 살던 궁녀를 '화초'로 그렸듯이 '부운’이란 언어에서 보듯이 간신배가 득실거렸고, 임금이 떠나간 궁을 찾았으나 영화로움은 지난 세월에 묻혔으며, 예나 지금이나 흐르는 강물뿐이라 슬픈 나머지 생의 덧없음을 읊었다. 고려 말, 이색이 찬란했던 고구려 때의 평양성을 지나다가 읊은 <浮碧褸(부벽루)>와 유사하다. 그 부벽루도 보자.

 作過永明寺(작과영명사) 暫登浮壁褸(잠등부벽루) 어제 영명사를 지나던 길에/ 잠시 부벽루에 앉았네. 城空月一片(성공월일편) 石老雲千秋(석로운천추) 성은 텅 빈 채로 달 한 조각이 떠 있고,/ 오래 된 조천석 위에는 천년의 구름이 흐르네. 麒馬去不返(기마거불반) 天孫何處遊(천손하처유) 기린마는 떠난 뒤 돌아오지 않으니/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서 노니시는가? 長嘯倚風磴(장소의풍등) 山淸江自流(산청강자류) 돌다리에 기댄 채 길게 휘파람을 부니/ 오늘도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인간 역사의 유한함이 자연의 영원성과 대비되는 쓸쓸함이지만, 고구려의 웅혼한 역사를 되새기는 자주적임이 묻어난다. 원나라의 주자학을 도입하고 그곳의 문하시중이었던 이색이 쇠퇴한 고려 말의 혼탁한 정세에서 동명왕(천자)을 그리며, 광개토대왕이 세운 아홉 절 중 하나인 평양 영명사에서 오언 율시로 고구려의 웅대했던 국력과 비교했으리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도 하나같이 다 갔다. 탐욕에 찬 허울을 벗고 우리 또한 가고, 후세에게로 이어진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자손만대에 영원히 이어질 대한민국호가 탄탄대로일 것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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