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평론가

 언론사 사주인 시인과 연을 맺은 지 10년이 넘었고, 초대까지 받아 대접도 한번 받았으나, 그는 나눔에는 인색하다. 기자와 필진들의 힘이 합쳐져 단독사옥에다 주간지까지 발행하는 자회사까지 가졌으면 간헐적인 기고자에게도 고료를 지급함과 예우를 해야 함에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참에 평론가인 내게 언젠가 시인이 된 그가 제법 뽐내며 평을 의뢰했겠다. 호불호가 오가는 평론가의 평에는, 설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법의 잣대로 처단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의 행각에 못마땅하던 차에, 딱 걸려든 셈인 순간을 맞았다. 스스로 굴에 들어왔으니 호랑이가 춤을 추는 격이다. 더구나 그는 평론가란 위치와 파워(?)를 잘 알며, 쉽게 평론가가 될 수 없단 것도 잘 알기에 예우에는 서툴지가 않다.

 작년 이맘때다. 아침 출근길, 그의 메시지가 카카오톡에서 울렸다. 비평해달라는 정중한 청이었다. 한때 문학이 아닌 시사평론가로서 필력을 날릴 때, 관계가 유지된 지인이기에 흔쾌히 응했다. 평론 중에서도 문학평론가로서 시를 받자마자, 즉석에서 단평을 하여 보냈다. 이에 문학평론은 내 자존심에 공짜는 없으나, 피하지 않는 그 용감성에 이를 벗어나는 쾌거를 시인에게만은 안기게 했다. 솔직하게 그대로 옮겼다. 단, 이 평은 깊이 고민할 필요성이 없어 단숨에 갈겼다. 아래는 그의 시, 시, 시이겠다. 아래에서 옮긴 후 다시 평을 해본다. 제목은 ‘나의 삶, 나의 사상’이며, ‘문XX 시인’으로 하여 써 보내왔다.

 나의 마음은 자본주의가 만든/안락한 침대를 좋아하고//나의 몸은/콩 한쪽도 함께 나눠먹는/사회주의를 지향한다네.//자본주의도/내 것이 될 수 있고//사회주의도 내 것이/될 수 있다네.//그렇다고 나의 몸이/자본주의 소유이거나/사회주의 소유가 아니려니//침대에서 뒹구는 일이나/콩을 나눠먹는 일이나/모두 나의 일이려니//그리하여/나의 몸과 마음이 참 좋도다.//(2020.9.3)

 이 시에 대해서는 오자 등의 오류는 없었으나, 대다수의 시인들이 자기나라 말인데도 국문법에는 서툴 듯이 띄어쓰기는 바로 잡고는 평한다. 그래도 겉만 치장하는 시인은 아닌 양, 아무렇게나 붙인 아호는 없이 ‘자신의 이름만’을 썼다. 하기야 대문호도 아닐뿐더러 걸음마 수준의 시인이, 평론가보다야 빈약한 독서력이 어쩌겠는가.
 자본주의가 좋다함은 굶주리지 아니하고 배부른 돼지가 되겠다함이고, 콩 한쪽마저 나누겠다함은 창조주 하나님의 가르침이었음이 불변의 진리임에 생각만은 가상하도다. 그런데, 카인의 후예답게 인류는 그 진리를 외면하고 있음에 어찌할까나. 이에 덩달아 시인도 나눔의 문화를 갈구하고 싶은 듯하지만, 수사에 불과할 뿐 행동은 따라주지 않는 이기利己가 넘친다. 여기서 내심과 달리, 안락함과 나눔을 외치는 것에만 안주하고 있음이 묻어남을 어찌할까나.
 고로, 그대 시인도 헤르메스가 인도하는 이승과 저승을 강변에 당도했을 때, 험상궂은 뱃사공 카론 노인이 자본주의 산물인 세속적 부는커녕 처자식마저 보존하지 아니하니 애달프지 아니하리오. 시인의 정육精肉이 좋다함을 넘어 '참 좋다'하나, 이쯤에서 배고픈 전업적인 작가나 주변의 동년배 노인들에게 조금만 베풀면 어쩌리오. 이것이야말로 실천하는 사회주의 정신이자 바람대로의 시인만의 영생을 추구함이 아니리오.
 사회주의가 좋다하나, 속물들은 몸소 실천하지 아니하거나 못하니, 에게해Aegean Sea 기슭에 묻혀 통곡하는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자 플라톤의 영혼에 사죄하면 좋으리오. 죽음의 문턱에 설 즈음에서라도, 시인의 더 나은 문행일치文行一致의 삶이면 좋으련만. 아무 것도 남김없이 두고는 떠나는 삶의 종착역. 그러면 잘 먹고 이승을 등지고도, 혹여나 영생을 누리지 않으리오.ㅡ정종암 평론가 씀.

 이렇게 평은 끝났겠다. 퇴근길이라 도서쇼핑에 들어갔다.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아 헌책방에서 책 4권을 4천원에 구매하는 횡재를 만났다. ‘일반적인 중고서점’에서는 지적욕구를 충족시킬 책이 없는 경우가 많아 ‘고서적까지 취급하는 헌책방’을 주로 가는 편이다. 읽을거리를 사면 겁이 난다. 좁은 내 서재의 배가 터질 것 같아 아슬아슬하기 때문이다.
 고요 속, 전화가 빗발친다. 인생은, 참 각양각색이다. 책 한 권 안 읽고도 호객꾼처럼 “날 보러 와요!”하면서 성性을 잃은 늙음도 모르는 아낙네도 있고, "정 평! 골프 한 게임하세. 비용은 내가 대겠소." 전자에 대해선 "고만 ‘딸기농사’(손주 키우기-필자 주)나 거들며, 시나 한 수 읊으소."로, 후자에 대해선 "보소! 내 골프 딱 15년 전, 방콕에서 신사바지에 구두 신은 채 마지막으로 치고는, 골프채를 등산지팡이로 쓴다고 말했었죠. 똥폼(?)잡고 드라이브샷한 공이 늙은 소나무에서 튕겨 나와 낭소나 안 맞게 조심하시죠?"로 응수한 오늘이 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누구나 아는 철학적인 명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에, 짧음의 자연의 법칙을 역행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굵게는 살 수 있다. 고로 촌음을 아끼면서도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란 윤심덕의 가사 한 구절이 생각나는 밤이다. 책 한 페이지 안 읽어도 살고, 읽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부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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