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원 법학박사
고성미래연구원장
(사)아시아교류협회장
(사)한국기업법무협회장

 경남 고성군 마암면 ‘두호(頭湖)’ 마을에 임진왜란 시절, 이순신 장군을 도와 나라를 지킨 '월이(月伊)'에 대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월이는 1570년(선조 3년)에 지금의 경남 고성군 두호에서 태어났다. 월이는 하늘의 달빛처럼 출중한 미모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소녀였으나, 마을 아이들에게는 ‘월이 대장’이라 불릴 만큼 활달한 아이였다. 

 월이가 10살이 되던 해에 마을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가옥은 불타고, 아버지는 무참히 살해당하고, 어머니는 포로로 붙들려 갔다. 졸지에 고아가 된 월이는 ‘무기정’이란 주막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목숨을 연명하였으나,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혼인도 마다하고, 문무를 다지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이가 20세가 되던 1590년(선조 23년)에 월이가 있던 주막에 조선사람이라고 보기엔 어색한 차림의 스님이 찾아들었다. 그자의 어색한 행동과 불안한 말투 등을 이상하게 여긴 월이는 ‘이 자는 분명 왜의 첩자가 틀림없다’라고 직감하고, 일부러 기생처럼 접근하여 스님과 사랑에 빠지는 척했다. 어느 날 월이는 스님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신주처럼 품고 있던 봇짐을 풀어보게 되었다. 

 그 봇짐에는 경상도의 해안과 바닷길 등을 상세히 그린 지도가 수두룩했다. 월이는 직감적으로 “왜군이 조선을 침범하기 위해 지도를 만들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육지로 연결된 고성의 당항만과 고성만을 바다로 이어진 것처럼 지도를 고쳐 다시 봇짐에 넣었다.

 월이는 이 사실을 고성관아에 알렸으나 오히려 기생질을 했다며 월이는 고성관아의 관기(官妓)로 전락하고 만다. 월이가 22세가 되던 1592년(선조 25년)에 드디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월이는 혼란을 틈타 관아를 도망쳐 통영 앞바다에 주둔하던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과거 왜군 첩자의 지도를 고친 사실을 고하였고, 이순신 장군은 크게 기뻐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고성 당항만으로 유인하여 무찌를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다. 월이는 고성의 당항포 일대 지리는 자기가 훤하게 꿰뚫고 있으니, 장군 곁에서 시중이라도 들게 해달라고 졸랐다. 마지못해 이순신 장군은 허락했다.  

 1592년 6월에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당항만으로 유인하였는데, 왜군은 월이가 조작한 지도를 믿고 계속 진격했다. 이순신은 월이의 계책대로 왜선의 퇴로를 막아 앞뒤 바다에서 조선의 수군이, 좌우 육지에서 조선의 궁사들이 왜선을 공격하니 당항포에서 왜선 56척이 전멸했다. 

 이때 왜군들이 속았다 하여 ‘속싯개’, 왜군의 머리가 둥둥 떠다닌다고 하여 ‘머릿개’, 왜군의 무덤이 되었다고 하여 ‘무덤개’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후에도 월이는 이순신 장군 곁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략과 전술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연전연승의 주역이 되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고성에 전해오는 ‘월이’ 설화에 필자의 상상력을 더한 소설임을 밝힌다.

 월이(月伊)의 헌신과 재치가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당항포 해전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고성출신 작가 정해룡님이 쓰신 ‘조선의 잔다르크 월이’란 제목에 동의하는 이유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풍전등화 같았던 프랑스를 구한 프랑스의 위대한 여성 ‘잔다르크’와 조선의 ‘월이’가 다르지 않다.

 특히, 월이를 단순한 기생의 재치나 기개로 보는 시각은 현대적 관점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사실만 보더라도, 월이는 당항포 해전 승리의 일등공신이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한 전쟁영웅이다.

 월이를 사랑하는 고성인들이 ‘고성향토문화선양회’를 조직하여 ‘월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는 월이를 조선의 전쟁 영웅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야만, “월이와 이순신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고, “월이 장군”을 소재로 웹튠을 제작할 수 있다. 이어 “영웅 월이”의 이야기로 뮤지컬을 창작하고, “당포해전”으로 명량해전과 같은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또 “월이의 애환과 삶”을 노래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 “월이 전사”라는 캐릭터로 게임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월이에 대한 문화콘텐츠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면 월이를 찾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월이가 살았던 두호마을과 간사지, 마동호, 당항포 일대를 거대한 ‘월이테마파크’로 조성하면 고성의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는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하지만 문화는 현대인의 창작과 상상력에 얼마든지 각색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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