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시사문학)평론가·연구인

 평안북도 정주 출생인 백석(白石, 1912~1996)은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낸 걸출한 천재시인이다. 흔히들, 누구나 한 줄의 글만 쓰면 문학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문학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엄연한 하나의 학문의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데도 백석 시인에 대해서는 누구나의 추측성 평이 난무한다. 암울했던 우리 현대사에 비추어보면 이해가 가는 면도 없잖아 있으나, 심지어는 그의 연인이었던 권번 출신 기생이자 수필가인 자야(子夜)에 대한 인격 모독마저 볼 수 있음에 씁쓸한 면을 안긴다. 
 학문적 관점이나 평론가로서 백석 시를 연구하다보면, 그가 노마드(nomad) 생을 즐긴 유랑자이면서 난봉꾼이란 생각에 물씬 젖게 하는 면도 있어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할 수도 있다. 숱한 유랑으로 시를 사랑한, 요샛말로 훈남(-男)이었던 백석은 영어를 비롯한 러시아어·중국어·일본어에도 능통했다. 그 유랑과 함께 수많은 여인과 교유했던 게 많은 사유 속에 걸작을 탄생시킨 면도 있다.
 그가 낸 시집은 북녘에 있다는 이유로 군부독재정권은 이데올르기로 인한 금지서로 옭아맨 때도 있다. 즉 잊혀진 시인이었다가,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1988년)에서야 어렵게 그의 시를 대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월북시인(越北詩人)이란 이유였다. 그러나 월북시인이란 족쇄는 억울한 면이 다분하다.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됐을 때, 남한 출신으로서 북한으로 월북한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과 만주 등지를 유랑하고 해방 전에만 해도 서울에서 생활한 이로, 자신의 고향을 찾아 북녘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러기에 하나의 재북시인(在北詩人)에 불과하다. 타의든, 자의든 남한 출신으로서의 월북한 이도 아니었고,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했다고도 볼 수 없다. 잠깐 김일성대학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으나, 줄곧 북한정권의 중심에서 밀려나 농사를 짓기도 한 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모더니즘에 드러나는 근대적인 특징이나 성향인 모더니티(modernity)를 품은 그는 1930년대 중반, 여섯 살 아래 '난'이란 여성 박경연을 찾아 한반도 삼천리를 유랑하면서 경상남도 통영까지 갔다. 통영을 오가는 길에 <창원가도>, <고성가도>, <삼천포> 외 한 달 간격으로 낳은 <통영>이란 시3 편과 <남향>이란 시를 포함한 7편을 남긴 점이 특이하다. 그것도 첫사랑을 찾아 3천리 또는 수도 서울을 기점으로 보더라도 1천2백리 길을 찾아서 말이다. 이 7편의 시는 그녀를 찾아 사랑을 고백하는 가도(街道)에서 창작했단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기도와 가도의 행렬은 실패로 돌았다. 결국에는 친구에게 그 사랑을 빼앗기고는 4년 연하의 권번 자야를 만난다. 
 이 땅을 먼저 살다간 선배시인에 대한 비난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참 행복한 시인이었다는 점에 부러움을 산다. 호사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부모님이 맺어준 아내 셋 외에 당대 지성미를 갖춘 셋 여성과의 사랑을 탐닉한 탕아(?)라고도 볼 수 있다. 도합 여섯 여성이라 함은 부모의 강압에 의한 혼례를 치룬 셋 부인과 난과 자야, 그리고 최정희까지 포함된다. 기자이자 소설가였던 그녀도 <국경의 밤> 저자인 김동환과 결혼하게 된다. 특히 ‘난’에게서만은, 카사노바와 같은 굴욕을 안았던 셈이다. 당대 모던걸(Modern giri)과 많은 교유가 있었던 모던보이(Modern boy) 백석의 여성편력은 여기서만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여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화고보 재학생이자 통영 출신 난과의 사랑이 끝난 후, 넷 살 아래인 자야(子夜)를 만나게 된다. 자야는 당시 3대 요정 중의 하나였던 대원각을 시주하고는 『내 사랑 백석』이란 에세이까지 남겼다. 일제가 가꾸었던 서울 성북동 소재 배 밭 속, 그 요정은 무소유의 삶을 설파한 법정(法頂) 스님과 함께 길상사란 절로 탄생시켰다. 자야는 기명(妓名)이 진향(眞香)이고, 본명은 김영한(金英韓)으로, 법정에게서 받은 법명이 길상화(吉祥華)이다. 이 “‘자야’란 아호는 백석이 당나라 시선(詩仙)이었던 이백(李白, 701~762)의 <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와 불러주게 됐다”고 그녀는 증언한다. 그랬을까. 원래 자야는 자시(子時)로, 의미는 ‘한밤중’을 뜻한다. 대략 밤 열한 시부터 다음날 새벽 한 시까지이다. 『악부시집』 제45 청상곡사(淸商曲辭)에는 <자야사시가(子夜四時歌)>라 하여 춘·하·추·동가(春·夏·秋·冬歌)를 싣고 있음에, 그 중 추가(秋歌)를 인용함과 함께 해독한다. 『이태백시집』에서는 이 ‘추가’를 자야추가(子夜秋歌)라고 일컫는다.

 “長安一片月(장안일편월), 萬戶搗衣聲(만호도의성). 장안의 조각달은 밝은데, 집집마다 새나오는 다듬이 소리.//秋風吹不盡(추풍취불진), 總是玉關情(총시옥관정). 가을바람이 불고 불어 그치지 않으니, 모든 사람들이 옥관문의 임 그리는 정을 일깨우네.//何日平胡虜(하일평호로), 良人罷遠征(양인파원정). 언제쯤 오랑캐들을 쳐부수고, 임께선 원정길에서 돌아오시려나.“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향한 여인의 그리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자야는 본디 오나라 동진(東晉)의 한 여인이 처음 지은 것으로, 오가(吳歌)라 하였음에 연유한다. 그런데, 이 자야가 민요조 악부시의 주인공을 따온 이름을 유독 김영한인 ‘자야’만을 지칭하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백석이 그 많은 아름다운 이름을 멀리하고, 굳이 자시 무렵인 시간에 함몰됐을까. 자시(子時)는 십이시(十二時)의 첫 번째 시간으로, 통상적으로 환락의 밤을 지새우고도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다. 난과의 사랑도 쟁취하지 못한데다, 이에 대한 보복심리가 엄습했을 수도 있다. 자야(子夜)는 이백의 시에서만이 아니라, 백석이 한창 사랑의 전주곡을 울리던 시점인 1933년에 간행된 중국 현대문학계의 태두인 마오둔(茅盾, 1896~1981년)의 『새벽이 오는 깊은 밤(子夜)』 속의 자야를, 통영의 난과의 사랑이 불발되자 허무함을 달램과 성적 유희를 위한 밤의 주인공 중 한 여인을 소환했을 수도 있다. 후자였다면, 자야를 ‘밤에 피는’ 야화(夜花) 쯤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4연으로 구성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 전문을 보자. 이 시에서도 의구심이 든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그리움과 고뇌를 달래려 소주를 마시며, 현실을 초월한 이상과 사랑에 대한 의지와 소망을 드러낸다. 이국적이면서 환상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화자가 사랑하는 ‘나타샤’란 여인은 누구일까. 19C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전쟁과 사랑에 관한 대하소설인 톨스토이 작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 나타샤는 1남 3녀를 낳은 튼튼하면서도 아름답고 다산한 암컷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는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여성관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진난만하고 꾸밈없는 젊은 귀족층 여인으로, 적국의 수장인 나폴레옹을 흠모하면서 부유했던 삐에르와 안드레이간의 삼각관계를 유지하는 치명적인 유혹에 빠진 나타샤이기도 하였다. 
 삐에르가 전쟁이 끝나고 짝사랑했던 나타샤를 다시 만나 결혼하게 되나, 중간에 허무주의자인 약혼자 안드레이가 없는 사이 아나툴리와도 불륜관계였던 나타샤를 백석이 지칭한 것만은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나 소설 속 나타샤는 난봉꾼에게 약한 미녀로 등장하는, 동양적이 아닌 이국적인 나타샤가 자야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자야가 평생 백석을 짝사랑했을지언정, 이 소설 속 나타샤와 일련의 애정행각에 비추어 볼 때 백석의 마음속 영원한 사랑, 즉 백석의 나타샤는 되레 <통영-남행시초>의 주인공인 난으로 보는 게 맞겠다. 근간 그녀의 딸 조 씨란 성을 가진 여인이, 조계종을 상대로 50억 원대 소송에서 승소했단 예기가 들리기도 한다. 그 시절 유력한 정치인의 애첩은 될 수 있었어도, 그녀의 주장과는 상반된다. 그리고 백석이 지칭한 자야는 복수의 여인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자야’도, ‘나타샤’도 김영한 자신이 주장하는 여인만은 아니다. 백석이 흠모한 여럿 여인 중 하나일 뿐이다. 근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마음속 연인 백석의 전공을 따라 영문학까지 공부한, ‘자칭 자야’인 그녀는 집착증(執着症)이나 허언증(虛言症)에 의한 기나긴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이러한 짝사랑도, 사랑은 사랑이다. 
 백석을 사랑하고 시 한 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그녀가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하고, 수많은 재산을 한 푼 남기지 않은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고 이승을 떠남의 그 숭고함은 후세 문학도들에게 길이 자리매김할 것이다. 자야 그녀의 무소유의 삶은, 이 각박한 세상에서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한 시절 풍미한 백석도 갔다. 그가 떠난 3년 후 그녀도 떠났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청춘의 사랑만큼이나 싱그러운 이 5월에, 자야의 체취가 남아있는 길상사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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