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시사문학)평론가·연구인

 우리나라에는 시인공화국이라 할 만큼 시인이 많다. 그러나 시인은 없고, 진정한 문인도 가물에 콩 나듯하다. 홍수를 만난 저수지의 수위가 넘치듯이, 문인을 흉내 내는 문인 아닌 문인이 넘치고 넘친다. 그래서일까. 진짜는 없고 가짜가 판치는 문단세계가 어지럽기에, 필자는 좀처럼 문학지에 문학작품을 기고하지 않는다. 문학비평을 지난 2014년도에 유수 문학지에다 기고한 게 마지막인 것 같다. 

 내 삶에는 천적처럼 ‘문학인’이라는 이력이 상존하면서도 좀처럼 내세우지 못하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평론가를 비롯해 문학계 3관왕이면서 대학원 최고학위과정에서까지 전공을 필한 탓인지, 순간적으로 뇌파운동이 일어나는 양 순간적으로 떠오를 때는 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때는 내만의 저장고에 저장하나, 책을 읽지 않는 사회의 활거에 흥행여부가 가늠되지 않아, 그 저장고에서 꺼내 출간을 못하는 실정에 있다. 이러한 연유로 스스로 '문학계 아웃사이더'임을 표방하고는, 후대가 평가해 주기를 내심 바라는 형국이다.

 함량미달인 자칭 문인들은 독자도 없는 실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더구나 장년을 넘은 노년층은 자비출판으로 자신을 홍보한다. 반면에 문을 숭상하면서 문으로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전업 작가는 배고파 울부짖는 형국이다. 일부는 세속적 부의 힘으로 문인이란 권력에 취하고는, 이들의 애환을 극구 외면한다. 대부분의 문학지에는 장르별 작품이 없다. 즉 노년에 접어든 노인들의 유희에 찬 화투판을 연상케 하면서 천편일률적으로 만만한 시만 난무한다. 그에다가 문학발전에 있어 이단아들이 제자를 배출한답시고 마구잡이 새끼를 치면서, 무슨 문학회 대표에다 온갖 감투와 아무 가치도 없는 별의별 상까지 남발하는 꼴의 연속이다. 산란기 암탉이 매일매밀 달걀을 낳듯이 허구한 날, 시를 배설해 쓰레기로 만든다. 요상한 모자에다 머플러 휘날리며 자화자찬에 매몰된 그들만의 패거리에 조소를 보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영혼 없는 합창이 울러 퍼지게 한다.

 팔리지도 않는, 제3자적 관점에서 보는 평론가의 비평조차 없는, 시집을 마구 양산해 일종의 공해를 일으키기에 독자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한다. 불후의 작품을 남기겠다는 각오는 뒷전이고, 독서력도 일천함은 물론 평론가에게서의 비평을 외면하며, 되레 피하기에 급급한 현실이다. 여기에다, 민족저항시인의 시는 온데간데없고, 친일청산을 부르짖으면서도 대한민국 수도 한 복판에서 친일시인들의 작품까지 암송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짧은 독서력에다 ET세계에서 온 이방인처럼 자신의 국어조차 파괴하려든다. 달리 말해, 자신이 한국시인이면서 자신의 국어를 외면하면서 자신의 손주가 퍼즐게임을 하듯이 글자 맞추기에 급급한 면도 난무한다.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울부짖게 하니 자기나라 말과 글에 충실한 이국(異國)의 문인이, 세계인이 웃게 만든다.

 자신의 지려천박(知慮淺薄)은 탓하지 않고 나잇살로 평론가의 지적과 비판에, 받아들이는 그 불문율을 무시하는 몰지각하고 허접한 문인은 없을까. 더 가관은 아주 쉽게도 누구나 범접할 수 있는 학문으로 생각하고, 문학에 있어 그에 따른 전공서적 한 권 읽지 않고도 문학을 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기도 한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사건으로서 몰염치의 비극이자, 비겁한 퇴보의 행각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있었던 또 다른 예화를 든다. 주변의 여류시인이 문학지에 시를 발표했겠다. 그 시를 본 평론가가 혹평을 했기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던 차에, 발표 1년 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평론가님. 내 시에 혹평을 그렇게 했어요?"라고 하고는, 알고 보니 일곱 살 연하, 그것도 동성이 아닌 이성인 평론가 왈 "건방지게!" 단말마에 아무 소리 못하고 훗날 문학박사가 되고, 이름 있는 시인이 되면서 강단에 서 있는 경우가 있다. 극찬할 일이다.

 세계5대자서전에 속하는 안데르센(Andersen, Hans Christian)의 《안데르센 자서전》을 보자. “평론가들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부분적으로 잘못된 점은 인정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교양이 부족하다거나 철자법 등의 문법이 엉망이라는 이유로 인하여 작품 전체를 떠나, 심지어는 모든 작품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분통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나머지 동화작가이자 소설가였던 안데르센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받고자 거의 10년 단위로 자서전을 3번이나 썼다. 그래도 평론가들에게서 ‘허영에 찬 글’이라고 더 호된 비판을 받아야 했다.”고 적고 있다. 

 세계문학사에 있어 세계인들은 네덜란드가 그의 국적임을 모를 수 있어도, 거의가 아는 인물인 그도 냉혹한 비판을 받는 속에서 우뚝하게 섰다. 유명한 작가들은 내심 친하고 싶지 않지만, 평론가와 싸움 아닌 싸움 끝에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켰다는 점을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안데르센 그가, 정상에 서기까지 평론가들에게 얼마나 얻어맞고는 성취한 결과물인지를. 또한 얼마나 많은 수려한 문장을 낳았는지를 말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이는 비단 안데르센만이 아니었단 점이, 작금에 있어 우리나라와 비교된다. 4세기 로마의 종교가로서 기독교회의 고대 교부(敎父) 중 최고의 사상가이며, 교부철학의 대성자(大成者)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의 《고백록》, 《삼위일체론》을 집필하면서 대중과의 호흡까지야 요하겠는가. 

 각 파트마다 스승은 있는 법이다. 그 사제 간은 나잇살인 연령을 초월하는 법이다. 아집을 버린 세상을 넓게 보는 부지런한 참새가 되는 걸 배격해서는 발전이 없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 했듯이 많이 읽어라. 사유하라. 그러면 감흥을 주는 폭넓은 소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써대며 겸허한 자세로 평론가를 가까이하면 불후의 명작이 나올 수 있어 독자가, 후세가 기억하게 돼있다. 더러는 국가가 위태롭고 국민이 좌절할 때는 희망의 홀씨를 뿌리는 게 진정한 시인이 아니겠는가.

 비난과 비판은 다르다. 작가는 비난이 아닌 비평에서 호불호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평은 법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평론가의 몫이다. 평론가는 대다수가 끝없는 독서열에다, 항상 탐구하는 자세로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면서 강단에 서기도 하고 후진을 양성하기도 한다. 문학도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을 탐구하는 엄연한 학문이다. 문학지에 고료가 흡족하지 않는 이상, 기고를 꺼린다. 아무데나 기고를 않으려는 자존심에 충만해있기도 하다. 

 이러한 탓으로, 문학지에 시나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수필만 난무하고 평론이나 여타 장르가 없다. 평론가, 까칠함의 대명사가 아니다. 대중과 소통하면서 한국문학의 불쏘시개 역할이 필요하다. 대중들이 올리는 한 편의 시가 감흥을 주기에 본받았으면 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글과 행동이 같은 즉, 문행일치(文行一致)로 대중들에게 당당해졌으면 한다. 대중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가치를 스스로 높여야 한다, 대한민국에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탄생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본고는 서울일보와 함께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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