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남 덕 현
(佛名:불명<法勝:법승>)
kbs491015@hanmail.net

 인생이란? 한 마디로 사람의 생애 즉, 일생을 뜻한다. 그런 인생을 자신의 욕구 충족만을 위해서 보낸다면 근심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편해야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본래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나 당신의 마음속에 탐욕심이 가득하게 되니 세상이 지옥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본래 지옥이란 탐욕심 많은 사람들의 싸움질을 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런지에 대한 내면적 생각은 없고, 바깥세상의 변화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니 그 삶이 허망하다 할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 접근하기 위해 부처님의 4가지 핵심적 말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부처님은 특별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마음속에 탐욕심이 제거된 선(善)한 도덕적 생각이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니 당신이 곧 부처님인 것이다. 필자는 인도 카빌라성의 태자로 태어나 깨달음을 증득하신 싯달타 부처님의 핵심적인 4가지 말씀에 대해 담론을 나누고자하며, 이것을 원인으로 당신의 인생이 평화로워지기를 바란다. 그럼 부처님이 인생에게 들려주는 4가지 핵심적 말씀은 무엇인가? 한 구절씩 제시하며 그 의미를 생각해보자. 그 첫 번째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이다. 두 번째가,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이다. 세 번째가,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이다. 네 번째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다.
 위의 4가지 부처님 가르침을 차례대로알기 쉽게 풀이해보자. 그 첫 번째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이다. 간략하게 해석하면,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우주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 마음도 몸도 생각도 만물도 수시로 변하니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개시허망이다. 다 허망한 것이다. ‘약견제상, 즉견여래’ 만약에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볼 줄 안다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이렇게 되어있다. 깨어있는 눈으로 이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의 나와 이세상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고 공(空)한 것이고 그러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가 인터넷을 통하여 이렇게 법문도 듣고 글도 보고 그림도 보고 그 온갖 것을 여기서 즐긴다. 이게 사실은 없는 것이다. 스위치 빼버리면 어느 순간 다 없어지지 않는가? 어느 순간 다 없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실제는 없는 것인데 환상으로 이렇게 나타나고 보이는 것과 같다. 어떤 기계조작에 의해서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스위치 빼버리면 말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상세계이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깨어있는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들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하는 틀림없이 있다고 여겨지는 이 현실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이 가상세계 컴퓨터의 세계를 이해하듯이 우리 현실도 그렇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눈을 달리 뜨면 그렇게 보인다. “컴퓨터 안에 나타나는 저것은 전부 가짜야 잠깐 그저 우리가 가짜를 보고 잠깐 즐기고 그저 놀고 장난하는 거야, 그러다가 뭐 꺼버리면 그뿐이야.” 이렇듯이 우리 현실이라고 하는 인생도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집착과 세상이라고 하는 집착, 그것을 깨트린다고 했는데 정말 진실하다면 왜 깨트릴까? 그게 없는 것인데 있다고 잘못 보니까 그 잘못 보는 소견을 깨트린 것이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도 그리고 세상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허망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현실을 허망한 것으로 또 공(空)한 것으로 현실을 현실이 아닌 것으로 가상으로 볼 줄 알 때 여래를 본다는 의미다. 여래라는 것은 진리라는 뜻이다.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이 아니며 역사적인 석가모니도 아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존재가 모두 그냥 그대로 여여 하다는 뜻이다. 그것을 여래라고 한다. 그 속에는 말하자면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보이지만은 이게 마치 그렇게 이제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그런 존재다. 모든 존재의 참 이치라는 그런 뜻이다. 그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그러니까 이 현실에 그만 집착하고 거기에 눈이 어두워져버리고 팔려버리면 그만 못 보는 것이니 현실 너머에 있는 세계를 못 보게 되니 현실에서 뛰어나오라는 것이다.

 그 다음 두 번째가,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이다. 간략하게 해석하면, 응당 색(色)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지어다. 응당히 어떤 사물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고 또 소리, 향기, 맛, 촉감, 법, 이런데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고, 응당히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그렇게 했다. 지식이 있고 없고는 깨닫는 것 하고는 관계없다. 이런 용어를 잘 안다고 해서 깨닫는 것도 아니고 용어를 모른다고 해서 깨달음의 조건이 안 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이런 자유로운 것이며 어디에도 머무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아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어떤 아집과 욕심과 내 나름의 잣대와 내 나름의 가치관과 내 나름의 판단, 내 나름의 만들어놓은 틀 이런 것 때문에 집착을 하고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들거나 내 마음에 무슨 깊은 관계가 있거나 그러면 그만 집착하여 거기에 눌러앉고 눌러 붙고 그런 습성이 있다. 이게 인생이다. 그래서 이 구절에 보면 ‘불응주색생심' 어떤 사물에도 마음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 또 '성, 향, 미, 촉, 법'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 마음을 내서 활용을 하되 거기에 머물지 말고 눌러 앉지 말아라. 그리고 우리가 내 자신에게는 아무리 올바른 판단을 하려고 해도 올바른 판단이 안되는 게 바로 애착심 때문이다. 어디에 머물지 말고 ’나다, 남이다.‘ 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면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마음을 쓸 수 있다.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머물지 않게 되어있는 마음이 우리의 인연관계 때문에 머물게 되니까 온갖 고통이 따르고 정확하지 못한 판단이 따르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가,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이다. 간략하게 해석하면, 만약 색신(모양)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만약에 몸의 모습으로서 색(色), 물질로서 물질로 된 이 형상(形相)을 보고서 나를 보거나, 내가 늘 그대들에게 음성(音聲)으로서 설법(說法)을 하는데 그 설법하는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거나 이렇게 하면은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行)하는 것이다. 능히 여래(如來)를 볼 수 없다. 보통사람으로서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라 하고, 부처님의 뛰어난 지혜의 설법을 듣고 또 부처님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이해하듯이 부처님을 그렇게 이해하면 그건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모양이나 음성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모양이나 음성에 집착하는 그 순간 벌써 여래의 진실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의미다. 부처님의 실상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데 그 뜻이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는다. 더 이상의 것을 볼 줄도 모르고 들을 줄도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형상과 소리를 넘어 실상에 눈을 떠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공(空)의 안목이며, 무(無)의 지혜다. 부처님을 바로 아는 것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겉모습을 보고 부처님의 전부라고 알거나 또한 설법하는 능력을 보고 부처님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며 영원히 부처님의 진실은 모르게 된다는 의미다. 부처를 찾아 나서는 이들이 많지만 부처라는 것 또한 대상으로 정해 놓고 찾아 나서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육근으로 부처를 만나고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눈으로 형상의 부처를 보려고 하거나, 귀로서 부처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지 못한다. 눈, 귀, 코, 혀, 몸, 뜻, 의 육근으로 촉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다. 간략하게 해석하면, 일체의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일체의 유의법(有爲法)이 모든 조작이 있는 법이라는 뜻으로 이해해버리면 그 범위가 너무나 포괄적으로만 들릴수 있다. 그렇지만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라는 의미를 자세히 고찰해보면 유위(有爲)란 조작(造作)의 뜻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는 의미이고, 바로 ‘연기(緣起)된 것’을 의미한다. 우주의 일체 존재는 모두가 연기된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 표현하는 것, 현실적으로 보고 들으며, 느끼고 아는 것 등 사람이 하는 것이나 자연이 하는 변화는 모두 유위라는 의미다. 일체 조작이 있는 일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또 이슬과 같고, 번개 불과 같다.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이와 같이 보라. 꼭 이와 같이 봐야 된다. 깨달으신 안목으로 세상을 보니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대들도 꼭 이와 같이 봐야 된다. 어떻게 하더라도 이렇게 봐야지 이렇게 못 보면 언제나 속고 거기에 집착(執着)하고 그래서 이제 결국은 괴로움이 따르게 되는 것이고 온갖 문제가 거기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이다. 그래서 인생에 대해서 경험으로 알든 아니면 지혜의 관찰로 알든 모든 인생은 아(我)와 법(法), 즉 나와 세상은 모두 조작이 있는 법이 유의법(有爲法)이다. 조작이 있는 일이다. 이것을 변화라고 한다. 변화하는 것은 종래에 가서는 없어지는 것이다. 그게 근본(根本)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끝에 가서는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 안목(眼目)으로 보면 끝에 가서는 없어진다. 그러나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보면 처음부터 없는 것으로 본다. 자기 자신도 세상(世上)도 모두가 그렇게 텅 빈 것으로써. 그 텅 빈 것이면서 또 자신이 텅 빈 것이라고 이해되니까 또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자유롭고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한껏 활동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허망하므로 속지 말라고 했다. 유위법에 속으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고통이 따르게 된다. 반야의 안목을 가지고 존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살라는 의미이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으라. 누굴 믿으라. 이런 의미가 없다. 일체 유의법과 무위법의 이치를 설명하고 이치대로 살면 인생들에게 아주 유익하며 그리고 행복해진다는 의미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4가지 진리의 말씀을 우리의 옆에 두고 늘 가까이 하고, 마음에 새기면 더 없이 행복한 인생이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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