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종 암
칼럼니스트
 "개판이다, 그리고 쪽 팔린다" 이 단어를 좀처럼 떠올리기 싫은 게 건전한 시민의 상식이다. 그러함에도 경남 고성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빗대 고향과 출향민, 더 나아가 일부 중앙언론에서 불학무식한 이 말이 회자되고 있다. 누가 잘했든, 못했든 간에 싸움은 떠벌리지 않고 당사자끼리 조용히 처리하는 게 쌍방 간의 인격을 지키는 게 개인이든, 공공기관이든 상책이다. 고성군과 축협간의 힘겨루기는 이제 도를 넘은 것으로 보인다. 중재나 말릴 단체와 어른은 없고, 되레 부추기니 꼴사운 어물전 망신살은 쫀득쫀득한 맛도 없다.

 더 이상의 언론플레이와 관변단체까지 동원하는 꼴은 또 다른 개망신이다. 그렇다면 진정되어야 사건이 점입가경에는 어떠한 배후세력이 없나? 있을 수 있다. 누구인가? 중앙정치 사기꾼들인가? 아니면 지방정치 사기꾼들인가? 그러지 말자. 정치 사기꾼 놀음에 가슴에 손을 얹고, 그놈의 권세에 짓눌려 말 못하는 지역지는 물론 지방지, 중앙지를 총망라하여 비겁하다. 언론 본래의 정론직필은 없고, 동네 양아치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 측은하다.

 더구나 꼴에 전국의 일부 지역지, 사무실 하나 놓고 토호세력의 앞잡이 노릇에도 쩐 한 푼 없는 바지사장 주제에 무슨 '대표이사'라고 모가지(목) 길어 슬픈 사슴 같은 깁스의 가소로움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뛰고 또 뛰어도 피라미 주제에도, 깁스를 하려면 내일 자신의 목이 날아가더라도 용감성을 발휘하는 게 사내대장부 아냐.
인생, 모로 가나, 지름길을 가나 구름 한 점에 불과하다. 저널리스트로서의 본분은 지키는 게 중요하다. 광고 한 줄과 밥 한 끼에 목메는 언론이라면 자격이 없으며, 어른은 어른으로서, 정치 사기꾼들은 사욕을 버리는 자세로 편 가르기에 의한 지역민의 삶의 질을 실타래처럼 헝클지 않아야 한다. 필자에게 제보된 걸 토대로 전국적인 보도로 더 진한 개망신은 않았으면 좋겠다.

 이쯤에서 작금의 사태에 대한 촌평을 그치고, 이하 글<병든 사회, 함께하는 춤으로 치유하자>란 제하의 글은 2007년으로 시계추를 돌려 우리들의 자화상에 각자가 반성하는 자세가 좋겠다는 취지에서 비망록에서 옮긴다. 이 비망록은 지도자와 공인의 자세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 지역에서 잘 났다고 거들먹거리지만 피라미에 불과한 골목대장(?)들에게 심금을 울렸으면 한다. 덧붙이면 지역의 수장이 되겠다면서 덜 배운 이 앞에서 영어를 찍찍거리는 이들이 필자의 글이 어렵다고 하는 비꼬는 경우도 있으나, 자신의 천박지려부터 생각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 보자(2015.4.2).


 재벌회장의 빗나간 자식사랑에 여론은 떠들썩하다. 22살의 굴지의 재벌 아들이 유흥주점에서 일으킨 폭력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같은 시기. 영국에서는 같은 또래의 왕위 순위 3위의 월리엄 왕자는 이라크전에 스스로 출병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두 젊은이의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병역의무는 젊은 남자라면 당연함에도, 가진 자들은 교묘하게 병역을 기피하고 있는 현실이다.
과연 한국에는 법치주의가 살아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선진국이라면 너무나도 당연한 '노블레스 오빌리주'는 한국에는 실종되었다, 아예 애초부터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이런 처사를 두고, 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평소시의 지론을 갖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왜, 요즘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재벌회장의 자제들이 유흥주점에서의 작태와 가진 자들의 젊은 자식들의 교모한 병역기피를 보면서 이 사회가 정상적인지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가지지 못한 자의 자식은 안중에도 없고, 가진 자의 자식만 특권과 사랑만이 독차지하는 듯한 사회. 그 가진 자들은 자식들의 싸움에 지위를 이용하여 가지지 못한 자식들에게 공포감을 넘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사건에 이 땅의 서민들은 씁쓸해 하고 있다. 그에다 이를 해결해야 할 공권력은 이 땅의 민초들은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소위 북창동사건을 벌써부터 인지하고도 은폐축소하려 했던 의문에 민초들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그 재벌회장의 고문이 직전의 경찰청장이라니..., 그 뿐이랴! 재벌에게 맥추지 못하는 듯한 경찰. 그 재벌회장에 빌붙어 있는 전직 막강한 사법부의 권력자였던 변호사들의 알리바이 조작술(?). 그 재벌에게 기생하여 조폭 노릇하는 하청업체 사장. 또 다른 조폭 두목과의 연계, 그리고 그 막강한 부를 등에 업고 가지지 못한 자식들 앞에서, 역사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꾼들이 나불거리는 민주사회에서 정의는 살아있는가? 무정의 앞에 가지지 못한 자식들은 한낱 불구덩이 속의 벌레에 불과하니 어찌 이 세상을 한탄하지 않으리.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한국사회. 그 재벌에게 빌붙어 먹고 산다는 이유 때문에 진실을 진솔하게 말 못하는 그 종업원들. 진실을 진실되게 말했다가는 파리 목숨처럼 달아날 그 위압에 견딜 수 있는 자세를 견지하는 게 좋다.
이 사건의 발단을 한번 추리해보자. 유흥주점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고객은 왕처럼 모신다. 오장육부를 내버려둔 채 봉사하는 곳이 유흥주점의 종업원들이 아니랴? 어쩜 고객은 왕이고, 종업원은 시녀에 불과한 관계이다. 오죽하면 고객들에게 당한 서러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업무가 끝나자 회포를 푸는 한 잔의 술을 그들도 원샷으로 굶주린 창자를 즐겁게 하였겠는가? 같은 또래들의 시비에 부모가 보복에 나서다니 어이가 없다. 재벌회장이기 이전에 쉰 중반의 나이에 말이다.

 공자는 이 나이면 "하늘의 뜻을 안다." 고 했거늘. 그 나이에 할 짓이랴. 인격수양이 덜된 너무나도 안하무인 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싸움에,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는 나이에 조폭과 비서진을 거닐고 술집에서의 폭행도 모자라 심야에 조폭을 동원하여 청계산까지 가서는 폭력을 행사한 하늘의 뜻을 알고 인생의 이치를 알 수 있는 연령대의 그 아버지. 자기 자식만 중하랴.

과연 내 자식이 이러했다면 나도 그랬을까?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축구의 명장 히딩크와의 리셉션에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TV에 클로오즙되었던 모습이 지금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그릇된 자식 사랑은 이 사회를 어지럽게 한다. 20대의 아들이 부모의 품속에 있는 것도 문제다. 또한 부모에게 의지하는 아들도 문제다. 부끄러운 오늘날 한국의 지도자층들의 자화상에 할 말을 잃는다. 이들에게 공권력마저 춤추는 꼴에 민초들은 누구에게 기댈 것인가? 힘 있는 자들의 솔선수범을 기다리는 것이 바보일까? -2007.5.9

저작권자 © 고성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