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 사랑은 짝짓기 시장에서의 마음에 드는 최적의 상품을 고르는 일이다)

남 덕 현(法勝: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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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주장하는 사랑이란? 내가 몹시 배고플 때에 나에게 남은 빵 한 조각을 나보다 더 배고픈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강조 하고 싶은 말은 상대방에 대해서 물질적 지원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정신적 공감을 의미한다. 정신적 감정적 교류와 공감이 없는 사랑은 물질적 이동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사랑이라는 공허하고 허황된 말은 사라지고 그 대신 생존이라는 말이 일반화 되고 있는 현실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사랑이라는 허황된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개인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으로 이용해왔는가를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렇게 변질 된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사랑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사랑이라는 게 뭐냐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이런 실현 불가능한 사랑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기독교의 예수도 이런 사랑과 거리가 먼 사랑타령을 했다. 신과 처녀가 결합하여 태어났다고 황당한 주장을 하는 예수가 가난한 유대인 목수의 양아들로 자라났으면서도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하는 독선적인 인간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나누어야 생명체의 종족을 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며, 또한 그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유대 조상신인 여호와 신의 창조원리이기도 하다. 이런 창조원리인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남녀관계가 없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우리나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단군신화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단군은 하느님의 아들과, 곰이 백일동안 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여자로 변한 웅녀와 결혼하여 태어난 인간이다.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냐? 그런 신화이야기를 그의 제자들인 유대인들이 실제의 사건인 것처럼 한 점 부끄럼 없이 하고 있다는 것과 그걸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다는 점이다. 물론 자신의 유익을 위한 욕심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인간으로써 실현 불가능하며 허황되고 추상적인 사랑타령을 반복 주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고단수 사기꾼일수도 있다. 그런 것을 본받았는지 모르지만 현대의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대부분 독선적이며 배타적이고 이기적이다. 물론 인간의 악한 속성이 안타까워서 그걸 순화시키기 위한 절박한 호소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현 시대는 생존의 위협 앞에서는 사랑 따윈 거추장스런 미사여구에 불과하게 되었다. 젊은 부부들 사이의 최고의 갈등은 경제문제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 결혼까지도 포기하며 자녀까지도 출산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에 사랑 따위를 말하는 건 배부른 자들의 허황된 사치와 말장난에 불과하다. 종교의 신앙이 생존수단으로 변모한지 오래 되었다.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면 사람들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송한다. 그리하여 가깝게 지내려고 하며 부담감 없이 접근한다. 여기까지는 정말 좋은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 이후로 부터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진실 되며 친절하고 좋은 사람은 점차적으로 이용당하거나 무시당하기 시작한다. 어딘가에 이용해먹을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되어진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동물인 까닭이라서 그렇다. 사랑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껍질만 난무하며, 그것은 개인의 생존수단을 위한 광고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뿐이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아무런 대가 없이 아낌없이 주기 때문이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어떤 것인가는 ‘쉘 실버스타인’ 이 지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란 동화책 속의 이야기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이야기를 들추어보면, ‘어느 곳에 나무 한 그루와 친구인 어린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언제나 나뭇가지에 줄을 매달아 그네를 타고 열매도 따먹고 나무와 즐겁게 함께 놀았다. 세월이 흐르고 소년이 성장하자 찾아오는 일이 줄어들더니 나무는 쓸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성장한 소년이 찾아왔다. 나무는 기뻐하며 예전처럼 자신의 열매를 먹으며 놀자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난 이제 너무 자라서 열매 같은 걸 먹을 시간이 없다고 했다. 소년은 일을 하기 위한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자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가져가라고 했다. 소년은 나무의 열매를 가져가 팔아서 돈을 많이 얻었다. 돈을 얻은 소년은 오지 않았다. 나무보다 돈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더 자라서 어른이 된 소년이 다시 찾아오자 나무는 예전처럼 가지에 매달려 그네타기를 하며 놀자고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난 너무 커버려서 그네타기를 하기엔 너무 무겁다고 했다. 소년은 결혼을 하려면 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베어가서 집을 지으라고 했다. 어른이 된 소년은 나무의 가지를 잘라 모두 가져가서 집을 지었다. 또 더 나이가 든 소년이 찾아와 너무나 슬퍼서 어디론가 멀리 가고 싶다고 했다. 나무는 자신의 몸통을 베어가서 배를 만들라고 했다. 어른이 된 소년은 나무의 몸통을 베어가서 배를 만들어 멀리 떠났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 소년은 이제는 노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는 나무에게 피곤해서 쉴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무는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밑 둥밖에 없으니 와서 그루터기에 앉아 쉬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루터기에 앉았다. 나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했다.

 이 소년이야말로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며 어느 정도 이기적인가를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무를 통해서 실제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 나오는 "너에게 더 줄게 있으면 좋겠는데,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늙어 버린 나무 밑동밖에 안 남았어, 미안해" 부모는 자식에 무엇이든 주려고 한다. 하나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언제나 예외적인 일들은 있으니 말이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조건 없는 이타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 자기결정권이 없는 삶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은 저마다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생물학적 본능이다. 그렇더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가장 옳은 방식은 자식이 스스로의 삶을 설계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엄마의 젖을 먹고 자란 사람은 삶 속에서 지치고 힘들 때마다 젖 냄새 나는 엄마의 따뜻한 품을 언제나 그리워한다. 자식들에게 젖을 물릴 때가 엄마들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요즘 엄마들은 자녀들에게 젖을 물리지 않으니 자녀들도 엄마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사실 엄마들은 자식들을 모태 안에 열 달을 키우면서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행복해 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상상할 수 없다. 적지 않은 기간 모태 속의 아이와 함께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나누며 애를 낳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태어나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독립할 때 까지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조건 없는 헌신을 한다. 여건이 다소 어렵더라도 자식들만큼은 고생시키지 않고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먹을 거 안 먹고 쓸 거 안 쓰면서 절약하지만 자식들에게 쏟는 정성만큼은 아끼는 게 없다. 때론 투정부리며 원망하는 자식들이 밉고, 섭섭함에 가슴 아파할 때도 있지만 금방 잊어버린다. 그럼 이제는 인간세상의 현실적인 사랑에 대해서 논의해보자. 자본주의가 발달한 우리 사회에서는 비정하게도 시장의 법칙이라는 이름하에 경제적 물질적 가치만 중요시한다. 이런 사회에서의 사랑은 한 인간을 짝짓기 시장의 상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랑을 체험하려는 현대인들은 짝짓기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이 되기 위해 힘쓰며 최적의 상품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할뿐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사랑은 짝짓기 시장에서의 마음에 드는 최적의 상품을 고르는 일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팔기 위해 포장한다. 젊은이들은 짝짓기 시장에서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짝짓기 시장에서의 연인이라는 상품의 소비를 위해 지불하는 것은 경제력, 사회적 지위, 직업, 집안, 유머, 신체. 매너, 취향 등 실로 다양한 요소들이다. 그리하여 적당한 배우자를 탐색하다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 데이트 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랑이라는 용어는 이미 상품화 되어버렸으니 더 이상 논의할 가치조차 없어진 셈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더 이상 삼지 말아야 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나 필요하고 좋은 낱말이지만 그것은 이미 생명이 끝나 폐품처리 되고 있는 현실이다. 정신적 감정의 교류가 없고 오로지 물질의 제공만으로 사랑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며 만족한다면 물질이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모두 공허한 물거품이 되고 만다. 감성적 교류가 사라지고 물질적 충족이 사랑으로 변질되어가는 인간사회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랑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하는 따뜻한 마음이다.
 현실은 사랑이 거래로 변질되어 상품을 사고 팔 듯이 판매되고 있으니 삭막한 세상이며 부모의 자식사랑만이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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