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면주민자치회장
정 희 학

 사람과 짐승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눈물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해 줄 것 같다. 눈물이란 아파서 울거나 누군가로부터 얻어맞아서 울거나 헤어진 누군가가 그리워서 울거나 하는 때의 눈물이 아닌, 어떤 감동적인 장면을 목도하고서 그 감동에 젖어 나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 이런 때의 눈물이 가장 사람다운 눈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살다보니 나는 어느 듯 눈물이 사막처럼 메마르게 되었으나 실상은 나는 외모와는 달리 마음속으론 깨나 눈물이 흔한 연약한 사람이었다.

 지난 토요일이었다. 회사일로 쌓인 피로도 풀고 다리며 팔이며 허리 등 이곳저곳 쑤시고 탈이 난 육신을 달랠 겸, 겸사겸사 동네 목욕탕을 찾았다. 더운 탕에 들어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더러 아는 이와 눈인사와 덕담으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중에  아흔 살 가까이 나이든 분을 정성스럽게 몸을 씻기는 40대 후반이나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눈에 들어왔다. 요즈음 목욕탕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유달리 호기심이 많은 나의 기질 탓으로, 탕 안에서 달리 할 일도 없어 가만히 젊은이가 하는 행동을 곁눈으로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세상에! 그 젊은이는 나이 든 분 몸의 손가락이며 팔이며 발가락이며 다리며 곰탁곰탁 부드럽게 씻기고 머리를 감기고 면도기로 조심스럽게 얼굴의 수염을 깎이고 이윽고 입속의 틀이를 빼어 깨끗이 씻고 양치질까지 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의  자세는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머니가 귀여운 어린아이에게 애정을 다해 하듯 정성스럽고 효심 가득한 행동이었다.
 “아버지, 몸을 이렇게 해 보세요.” “저렇게 하세요.” 하며 아버지의 몸을 씻기에 편하게 자세를 바꾸려 할 때에도 그 젊은이의 목소리 또한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존경, 사랑과 효심이 우러나고 배인 음성 그 자체였다.

 그러한 젊은이의 행동을 보게 되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 하더니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내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눈물이었다. 더운 목욕탕 열기와 수증기로 인해 내 눈물이 다행히 땀으로 보였을 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손수건이 홍건이 젖을 정도로 많은 눈물이었다. 그 젊은이의 효심 깊은 행동에 감동과 감명을 받아 흘린 눈물이 2할이라면 8할은, 사실은 나의 불효에 대한 반성이었던 것이다.
 그랬다. 그 젊은이를 통해서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나의 불효를 반성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저 젊은이처럼 내 부모에게 저렇게 한 적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아! 보모님이 살아계신다면 나도 저 젊은이처럼 해 드리고 싶구나.” 하고 속으로 뇌이며 흘렸던 눈물이기도 했다.

 문득 나에게도 저런 아들이 있는데 내가 나이 들어 늙었을 때 내 아들은 저 젊은이처럼 내게 저렇게 해 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심각해졌다. 다들 효도를 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나 크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요즈음의 세태다. 효도를 받고 싶으면 청마(靑馬)의 〈행복〉 시에 나오듯이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을 주라’고 했듯이 부모가 자식에게 베푼 것이 많으면 자식 또한 부모를 섬기지 않겠는가 하는 뜻에서 해본 것이다.
 하지만 심청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사랑이 많아서 자신의 몸을 인당수의 제물로 팔았던 것은 아니고, ‘오이디푸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 또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물이 많아서 눈먼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한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심청이나 ‘안티고네’의 행동은 오로지 인륜이라는 효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목욕탕에서 본, 어느 젊은이가 아버지에게 해드린 이 작은 효심어린 행동이 나에게 감동을 주어 눈물을 흘리게 했듯이 나 또한 나의 작은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이고 싶다는 생각을 목욕탕에서 해 본 하루였다.
 나를 울리게 한 어떤 효심을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젊은이들이 공유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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